[감성터치] 비 개인 오후, 뜻밖의 달팽이처럼

박재숙 시인 2023. 8.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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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숙 시인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다. 해가 쨍하다가도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이날도 장대 같은 비가 땅에 꽂히더니 오후가 되자 멈추었다. 그 사이 분리수거를 하고 집으로 다시 들어오는 길에 조그마한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느리게 기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 발에 밟히기 쉬운 현관 앞이 위험한 줄도 모르고 천하태평 기어가는 달팽이의 목적지가 궁금해졌다.

달팽이처럼 등을 둥글게 말고, 쪼그려 앉아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니? 그렇게 천천히 가다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발에 밟혀 죽을 수 있어.” 하지만 달팽이에게 내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묵묵히 가던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 작은 아이는 보도블록 사이에 나 있는 풀 한 포기를 향하고 있었다.

문득, 나 살기도 바쁜데 달팽이의 생까지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다. 네 운명에 맡겨야지 어쩌겠니’. 그냥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나는 다시 달팽이에게로 향했다. 힘없이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아이가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에이, 왜 하필 내 눈에 띄어 가지고…, 여기 있으면 위험해 나랑 같이 집에 들어가자.” 손바닥에 작은 것을 올려놓으니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쉼 없이 더듬이로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얼마 전 어느 시인한테서 선물로 받은, 잎이 풍성한 나팔꽃 화분 안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를 집게손가락으로 다시 들어 올렸다. “안 되겠다.” 이러다가 화분에서도 탈출해 바닥을 돌아다니면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녀석이 습도가 높고 비가 자주 내리는 날을 좋아하다 보니, 겁도 없이 아파트 화단을 이탈해 현관 앞까지 기어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조심스레 엄지와 검지로 작은 아이를 들어 올렸다. 불안했는지 패각 속으로 몸을 숨긴 아이를 손바닥에 올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파트 화단으로 데려갔다. “습한 곳에서 좋아하는 풀 마음껏 뜯어먹고 건강하게 지내야 해?”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를 화단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작은 아이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일이나 걱정해’라는 듯이 또다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미련하리만큼 묵묵히,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느린 것도 용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잃고 홀로 헤매는 달팽이를 보며,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바둥거렸던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나의 도시에서의 첫 사회생활은 아찔했고, 차가운 시선 속에 겁에 질려 있었던 시절이었다. 의지할 곳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 앞에서 나는 느렸고, 수시로 무기력해 있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초점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방향을 잃고 도착지를 놓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외딴섬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연극 또는 콘서트 등을 통해 그 시간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얼마 전 나는 싸이 흠뻑쇼에서 사람들과 뒤엉켜 노래와 춤과 물에 젖어 맘껏 즐겼다.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온 사람들이 돈과 맞바꾼 한 장의 티켓으로 눈치 보지 않고 고단함을 씻어 내리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넓은 세상에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하며 절망하기도 한다.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가꿔 나가지만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길에 당도해 있을 때가 있다.


‘꽃은 가장 절박할 때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다. 위기가 닥치면 절망하기도 하지만 극복을 잘하면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는 어느 라디오 디제이의 말이 떠오른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의 말을 빌리자면 ‘고통은 삶의 본질’인 것이다. 삶이 얼마나 아프면서도 기쁜 건지 우리는 매일 이 견고한 세상의 벽을 타고 오르면서 느끼고 있다. 비 온 뒤 뜻밖의 달팽이처럼 묵묵히 나의 길을 걷기로 한다. 반복인 것 같지만 다르게 찾아온 오늘을 반긴다. 차분하면서 가치 있는 하루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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