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내가 비겁해지는 이유
나는 제약 회사에서 일한다. 질병을 치유하고 고통을 경감하는 약을 만들려는 노력은 귀하다. 나는 이보다 갈급하고 이타적인 직업을 좀처럼 특정할 수 없다. 나는 이 직업을 아끼지만, 너무 어려워 자주 내 무능에 절망하곤 한다. 제약 회사에서 제약이란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업무이지만 가장 까다롭고 버거워 잘하기 힘든 극치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비겁해진다. 약에 천착하는 대신 회의 자료를 만드는 데 필요 이상의 시간을 들이고, 연말 상여금 걱정에 업무 역량과 업적을 부풀리는 데 신중을 기한다. 그것은 약을 만드는 일보다 수월히 나를 돋보이게 해준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거나 퇴근 후 여가를 즐길 힘을 아끼고 내일을 위한 숨을 고를 수 있다. 그런 활동 역시 약을 개발하는 긴 과정의 일부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대체로 난도가 높고 내 능력을 벗어나 있는 듯하여, 잠시 미룬 채 다른 샛길과 지름길을 찾아보는 약삭빠른 이기심이 이 세상을 복잡하고 비효율적이면서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운 원동력인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핵심적인 일을 외면하는 동안의 부산물일 뿐이다.
나는 삶을 위해 태어났지만 살아보니 힘겨워 시를 쓰게 됐다. 골방에 처박혀 쓰는 시에 재미를 들여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자꾸 망설이다 문득 중년이 됐다. 시가 삶보다 쉬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지나간 그 시절을 회한한다. 사명감이란 단어는 구년묵이가 되어 입술에 발라놓기도 어색한 시대이지만,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한눈 팔아 딴짓하는 중에도 숨겨진 새로운 의미들이 발견될 테지만, 우리의 존재를 허락 받은 이곳에서 약속한 본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살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번쯤 나의 직무는 무엇인지 의심해볼 때다. 하지만 삶에서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는 게 좋아 오늘이 편법처럼 느껴지는, 아무 아픔 없이 눈부시게 맑고 높은 빛나는 날에, 이 삶 밖에서 내가 미루고 있는 중요한 일 따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글을 쓰며 아무것도 안 한다.
채길우 시인·제약 회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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