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사법 무력화 몸살… ‘트릴레마(trilemma·3중 딜레마)’가 숨어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2023. 8.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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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중동천일야화]
네타냐후 사법 무력화 핵심은 민주주의 깨고 유대주의 하자는 것
1948년 건국 당시 세 원칙은 유대주의·민주주의·故土 회복
점령지 아랍인 늘며 딜레마… 민주주의 포기하면 번영 계속될까

이스라엘이 사법 무력화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법원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네타냐후 보수 우파 연립정부와 이를 막으려는 사법부의 갈등이 첨예하다. 일견 일상적인 권력 갈등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뿌리 깊은 이민 국가의 정체성 논란이 있다. 건국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여야 하는지 지도자들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벤구리온 초대 총리는 동지들과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유대국가, 민주국가 그리고 고토(故土, 약속의 땅)의 회복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다. 배경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D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은 훼파되었고 유대인들은 흩어졌다. 이산(離散),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삶이었다. 이후 유럽 기독교 세계에 편입하지 않고 자기 문화를 고집하며 오랫동안 미움을 받았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시달렸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포그롬)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결심했다. 영속적인 생존이 가능해지려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한다. 마침내 1948년 5월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천년 만에 나라를 회복했다고 믿는 이스라엘 국민에게 유대국가 정체성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진=연합뉴스
그래픽=양진경

이스라엘은 민주국가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다 보니 토론과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주의 공론장은 필수였다.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시오니즘 운동은 영국의 도움을 받았고, 건국 당시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친서방 진영에 편입, 민주주의를 택했다. 냉전이 본격화되던 즈음 미국 전략가들은 아랍과의 관계를 감안, 이스라엘 건국에 유보적이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이 우려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인근 아랍국과 달리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대국가와 민주국가, 두 국가 정체성은 이스라엘이 적대적인 아랍 틈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 준 기반이었다. 유대민족의 고난 서사는 내적 결속의 동력으로 작동했다. 민주국가 이스라엘은 미국이 변함없이 안보 협력을 지속하게 만드는 요건이었다.

이스라엘은 고토를 회복한다. 건국 20년을 맞던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을 격퇴하며 대승을 거둔다.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이 점유하던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장악했다. 특히 동예루살렘 점령은 이스라엘 고토 회복의 정점이었다. 점령 지역 도처에 정착촌을 세우며 유대인들은 이주해 들어갔다. 국제사회의 제동도 먹히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든 점령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로 확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유대국가, 민주국가 이스라엘이 고토까지 회복하며 다 얻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변수가 나타났다. 인구의 변화다.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 이스라엘 국적 아랍인도 늘었을 뿐만 아니라, 점령 지역 거주 팔레스타인 인구가 문제였다. 이스라엘 본토 및 점령 지역인 서안지구, 가자지구 인구 분포상 대략 팔레스타인 인구는 유대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은 ‘트릴레마(trilemma)’에 빠졌다. 유대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고토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점령 지역을 자국 영토로 병합해버리면 거주민들에게 국적 및 투표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다. 아랍과 공존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유대국가가 위험해진다. 인구 변동 추세상 기계적으로 1인 1표씩을 행사하면 이스라엘에 아랍 정부가 세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반면 영토도 유지하고 유대국가도 지키려면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차별(아파르트헤이트) 국가가 된다.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유대근본주의자들의 강고한 입장이다. 답이 될 수 없다.

이 두 곤란한 상황에서 찾아낸 답이 바로 1995년 오슬로 협정에서 합의한 ‘두 국가 해법’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에 떼어주어 분리시키는 방안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땅을 양보하는 것이다. 국가로 독립시킨 팔레스타인과 정상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은 유대국가와 민주주의를 둘 다 지키는 해법이다. 현실주의자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신이 주신 땅 한 치도 적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거세다. ‘평화와 영토의 교환’을 내걸고 오슬로 협정을 타결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결국 유대 근본주의자의 총탄에 숨졌다.

최근 이스라엘의 사법 무력화 갈등은 바로 이 트릴레마와 연관이 있다. 민주주의를 버리고 극우 유대국가를 지향하는 네타냐후 연정 극우 각료들의 노골적인 주장을 사법부가 막고 있기 때문이다. 연정이 깨지면 정치적 생존이 위험해지는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정파를 편들고 있다. 이 질주를 막을 유일한 주체는 사법부다. 연립정부가 개혁을 명분으로 사법부 영향력 축소 및 무력화에 나선 이유다. 이에 민주주의 붕괴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유대국가를 지켜야 하고 땅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며 민주주의를 포기하자는 이들은 말한다. 사우디, 이란, 튀르키예등 주변이 온통 권위주의로 득시글거리는데 왜 이스라엘만 유약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느냐 강변한다. 강력한 유대주의로 무장하자는 논리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엄혹한 안보 환경에서 생존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합리적 민주주의 전통 때문이었다. 합리성과 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이스라엘은 위험해진다. 이스라엘의 트릴레마,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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