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33] 억왕손, 하사(憶王孫·夏詞)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8.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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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지원

작은 연못 물풀들 바람 스치는 소리

비 그친 뒤 정원 연꽃 향기 가득하고

우물에 담근 오얏과 참외 눈처럼 얼음처럼 시원하네.

대나무 평상 위에서

바느질거리 밀쳐 두고 낮잠에 빠져 버렸네.

-이중원(李重元) (류인 옮김)

그 옛날 한가로운 우물가 풍경이 눈에 그려지지 않나. 무더운 여름날, 우물에 담근 참외를 먹고 평상에 앉아 바느질을 하려는데 졸음이 몰려와 단잠에 빠진 여인의 시각으로 묘사했으나 작자는 북송 말에 살았던 (남성) 문인 이중원이다. 여성이 문필 활동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기 힘들던 때 ‘하사’와 같은 노래 가사를 통해 당시 중국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송나라의 문학 양식인 송사(宋詞)에는 매 수(首) 곡조명이 있는데 이를 사패(詞牌)라고 불렀다. ‘억왕손’은 7언 3구 뒤에 3언, 마지막에 7언으로 구성된 사패이다. 봄을 노래하거나 가을의 정취를 읊은 송사는 많은데 여름 노래가 드물다. 여름엔 풍경 변화가 드물어서인가, 더워서 노래를 지을 기력이 없었나?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이면 차가운 물에 참외나 수박을 담가두던 풍경이 내겐 낯설지 않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는 우물에 얽힌 추억이 하나쯤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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