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폴란드 작은 도시, 제슈프를 아시나요?
전쟁 재건사업 준비 활발
외국 투자유치 위해 민관 뭉쳤던
‘과거의 대한민국’ 시절 떠올라
제슈프(Rzeszow)는 폴란드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다. 윤석열 대통령 등 모든 서방 리더들이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할 때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G7 등 해외 순방에 나설 때도 이곳을 통한다. 우크라이나 국경까지 100㎞가 안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는 수많은 도시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기자도 제슈프시(市)가 주최한 우크라이나 재건회의에 초대받아 방문하기 전까지는 제슈프를 알지 못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마자 제슈프를 최전방 보급 기지로 정했다.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모든 군수 물자가 제슈프에서 출발한다. 밤마다 제슈프 공항에서 미군 수송기가 이착륙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미군과 군속 등 미국인이 5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미국의 전투기 등 항공 엔진 제작사인 프래트&휘트니도 이곳에 공장이 있다.
제슈프 공항에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다. 공항 활주로 주변에 12기가 한 방향으로 전개돼 있다. 모두 러시아를 향해서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바로 옆에 미군 차량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로 봐서 작전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 러시아 용병 바그너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기려면 제슈프를 쳐야 한다고 한 데서도 제슈프의 전략적 가치를 알 수 있다.
크리스티나 스타초프스카 제슈프 부시장은 “3년 안에 미국인이 1만5000여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라며 “미국 사람들을 위해 국제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슈프 시내 음식점 등에서는 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제슈프에서 가장 큰 병원인 센트럼 메디친 병원을 운영하는 스타니슬로프 마주르 박사에게 “패트리어트 미사일 때문에 전자파로 건강을 해쳤거나 농산물을 먹지 못하는 사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만나는 폴란드 사람들마다 “한국과 폴란드는 역사적 백그라운드가 비슷하다”면서 한국 기업의 투자를 기대했다. 폴란드는 오른쪽에 러시아, 왼쪽에는 독일, 밑으로는 과거 오스트리아-합스부르그 왕조에 치여 편안한 날이 없는 나라였다. 한국이 중국·일본·러시아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유사하다.
경제가 정치를 앞선 것도 과거의 한국이랑 비슷했다. 2002년부터 19년간 시장을 지낸 고(故) 타데우슈 페렌자(2022년 작고) 시장은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면서 “나는 제슈프파”라고 했다고 한다. 시정(市政)을 정치 이념이 아닌 생활 밀착형 이슈에 초점을 둬 5선 시장을 지냈다.
그의 큰 업적 중 하나가 규제 완화를 통한 기업 유치였다. 그는 재임 중 항공·제약·IT 기업을 유치했다. 기업이 들어오니 인구도 늘었다. 2005년 16만명에서 지난해엔 20만명을 넘어섰다. 페렌자 시장의 또 다른 업적은 포장도로였다. 시내 어딜 가나 도로에 움푹 파인 구멍 하나 없었다. 겨울에 포장도로가 깨지는 이유는 물이 스며들었다가 얼면서 터지기 때문인데, 물이 쉽게 빠지는 화산재를 구입해 도로 포장에 사용했다고 한다. 제슈프가 해마다 포브스지(誌)가 선정하는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중소 도시’ 1~2위에 오르는 이유다.
스타초프스카 부시장은 “지금도 제슈프에는 우파나 좌파가 없다”면서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참여하는 한국 기업들이 온다면 유럽에서 가장 친(親)기업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제슈프시(市)에 있는 동안 20여 년전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민·관이 하나로 뭉쳤던 우리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잊어버렸던 대한민국파(派)의 등장을 기대하게 만든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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