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카눈과 카눈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했다. 조용히 비켜 가면 좋았을 텐데 기어이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카눈'(Khanun)은 열대과일 잭푸르트의 태국어 이름이다. 태풍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기 위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과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열대우림을 방불케 하는 뜨겁고 끈적끈적한 8월의 저녁, 태풍이 지나간 여름답게 환하지만 허탈한 고요가 가만히 번져 가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부서진 4월'을 떠올린다.
'부서진 4월'은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로 '카눈'에 관한 이야기다. 열대과일이 아니고 '카눈'(Kanun)이다. '법칙'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논(Kanon)에서 왔는데 같은 의미의 영단어 '카논'(Canon)이 있다. 언어의 의미론적 차원에서는 동의어지만 알바니아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는 그 감각이 다르다. 잉크 냄새 나는 '규범'이 아니라 살벌한 피 냄새를 풍기는 '관습법'이기 때문이다.
"피는 피로써 값을 치른다"는 카눈 26항 125조에 쓰여 있다. 관습법은 살인자나 그 가족을 죽이는 복수의 권리를 유족에게 보장한다. 피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지고, 피는 돌고 돈다. 죽고 죽이는 악순환이 끝없다. 주인공 그조르그는 형의 복수를 하지만 그 즉시 새로운 복수의 표적이 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이 녹지 않은 초봄의 산악지대를 방황한다.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다. 20세기 초에 사라진 15세기의 관습법 카눈은 1990년대 알바니아 북부 고원지대에서 부활했다. 공산정권이 해체된 후 들어선 새 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이 문제였다. 썩은 공권력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양산하자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일부 알바니아인들이 옛 관습법인 카눈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관습에 기댄 야만스런 사적 복수지만 적어도 산악 고원지대 그들의 사회 안에서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엄중하게 적용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현대의 복잡한 법적 체계보다 더 공정하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카눈'을 생각하면서 법의 불공정성이 아닌 '참을 수 없는 법의 가벼움'에 몸서리치고 있다. 신림역에서 칼부림을 벌인 조선은 전과 3범에 14번의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 경찰은 칼을 든 범죄자를 상대로 강한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소송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머그샷을 거부하면 찍을 수 없다. 검사가 무기징역을 구형해도 판사가 감형한다. 초범이라서, 우발적이라서, 주취상태라서 중형을 피한 범죄자들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교도소에서 지내다 출소하면 또 범죄를 저지른다. 잠재적 살인마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법이 무르니까 칼부림 예고 글 장난질이 횡행한다.
현대법의 테두리 안에서 시민들은 보호받는가?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를 보상받는가? 법은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의 절규에 응답하는가? 온갖 합리적, 과학적 장치들이 있지만 증거의 법적 효력이 인정되지 않거나 범죄자의 심신미약상태, 우발적 동기,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의 인권까지 고려해 처벌이 감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죗값이 너무나 싸다. 물가는 오르는데 죗값은 점점 싸지기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용서나 화해, 반성이 점점 자취를 감춰가는 것도 법적 처벌이 느슨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용서, 화해, 뉘우침은 모두가 두려워 벌벌 떨 만한, 그래서 거기 처해지는 이를 연민하게 될 만한 강력한 법 규제가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죗값은 비싸야 한다. 칼 들고 설치다간 내가 죽는다는 불안감이 들어야 죄 지을 엄두조차 못 낸다. 법이 열대과일처럼 무를 때 테러리스트들은 과육을 해체하듯 마음껏 칼질한다. 그조르그가 아닌 우리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데 왜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칼날을, 죽음을 의식하면서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거리를 걸어야 하는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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