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고발 공화국'의 오명 벗는 길 [금태섭의 '한국정치 뜯어보기']
편집자주
진짜 중요한 문제들은 외면한 채 양쪽으로 나뉘어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구체적 사례로 분석하고 해결책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갈수록 가속화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
대화 아닌 ‘법대로’, 이전투구 초래할 뿐
오바마 ‘품위 있는 행동’, 타산지석 삼아야
코인 문제로 공방이 벌어지던 지난달, 국민의힘은 엉뚱하게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를 고발하겠다고 했다. 국회의원들의 코인 거래 내역을 공개했다는 이유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국회 회의 중 코인 매매에 몰두한 김남국 의원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여론조사에서는 과반수에 달하는 응답자가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의원들도 코인을 거래하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고 자진 신고를 받았다. 정당들 스스로 내역을 공개하고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이 알려졌다고 해서 국회의 공식 기구를 고발한다니.
부정적 여론에 부딪혀 며칠 만에 고발 방침을 철회했지만, 이 사례는 우리 정치가 얼마나 형사사법에 의존하고 있는지 실상을 보여준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상식 있는 정치인들이 '정치의 사법화' 현상에 대해 개탄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화 일로를 걷는다. 조금만 논란이 되는 문제가 생기면 고발장을 작성해서 검찰청으로 달려간다.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사안이면 한통속이나 다름없는 각종 단체를 대신 시킨다.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야 할 일을 검사와 판사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서 절충안을 내는 정치와 달리 기소와 판결로 이어지는 고소ㆍ고발은 완승과 완패라는 일방적 결과를 예정하고 있다. 고발을 당한 쪽은 형벌이라는 최악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맹렬히 저항한다. 고발장을 제출한 쪽도 사실과 다르면 자칫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 상대방이 죽느냐, 내가 죽느냐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외국의 사정은 어떤가? 적어도 우리나라처럼 정치 지도자들이 고소ㆍ고발을 남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회의원 시절 일본 검사들을 만나서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여야 정치인들이 고발을 하고, 반대쪽에서는 다시 무고로 고소하는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법무성에 근무하는 최고위직 검사부터 일선 검찰청의 평검사에 이르기까지 약속이나 한 듯 폭소를 터뜨렸다. “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생각도 안 해봤습니다. 일본에서는 정치인들이 그런 문제로 검찰에 고발하지 않습니다. 고발한다고 해도 검사들이 나서서 수사하지도 않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죠.”
부끄러웠다. 한국에서는 정치인들이 일반 시민을 고소하는 일도 흔해졌다. 문재인 정부 때는 민정수석이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는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부 장관이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게 과연 정상인가.
어떻게 하면 이런 후진적인 행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리더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대통령이나 법무부 장관이 ‘적어도 우리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은 고위 공직자가 형사 고소를 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야당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잘못을 고소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바마의 사례를 들려주고 싶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황당한 공격을 했을 때 그는 고소하지 않고 출생증명서를 공개해서 반박했다. “그들이 천박하게 행동할 때 우리는 품위 있게 행동한다.” 미셸 오바마가 했던 이 유명한 말을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실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상대방이 잘못할 때 대통령이나 법무부장관이 고소를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중 어느 쪽이 선진적인 정치를 하는 것인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고소ㆍ고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는 길은 요원하다.
금태섭 전 국회의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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