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한국적’이었던…‘잼버리 사태’로 드러난 5가지 병폐
‘K팝은 일류, 행정은 삼류.’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는 이렇게 요약된다. 썰물에 갯바닥이 드러나듯 잼버리가 지난 자리에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곳곳에 남아있다.
①이때다 싶어 고개 든 혐오·차별
잼버리 대회의 열악한 시설·위생 상태가 지난 1일 개영 직후부터 논란이 되자 개최지인 전라북도에 대한 ‘지역 혐오’ 발언이 확산했다. 극우 성향 유튜브 채널들은 ‘전라도 잼버리 참사’ ‘잼버리, 전라도가 먹고사는 방식’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단 영상을 게시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호남과 호남 주민에 대한 비하와 혐오 댓글이 줄을 이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13일 “이번 잼버리 파행 때문에 가장 상처를 받았을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전북도민”이라며 “과거부터 지역에 대한 혐오를 생산했던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또다시 마구잡이로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고 했다.
여당이 중앙정부 책임론을 피하려고 야당 소속 단체장이 있는 ‘전라북도 때리기’에 나선 것이 ‘전라도 대 대한민국’ 구도가 확산하는 데 기름을 부었다는 지적도 있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지난 9일 “애당초 (잼버리) 공동위원장에 여성가족부 장관이 들어가 있을 뿐 실제 행사 준비 및 주도는 전라북도가 해 왔다”면서 “이제 와 중앙정부를 탓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지방자치의 미래가 있겠나”라고 했다. 전주혜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은 “잼버리의 책임기관 중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전북도”라고 했다.
②“까라면 까” 권위주의 통치
“위기에 나라를 살린 금반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못할 게 없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1998년 외환외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을 소환했다. 같은 당 성일종 의원은 “국방부는 BTS(방탄소년단)가 국격을 높일 수 있게 잼버리 대회에서 공연할 수 있게 지원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문제가 생기면 민간 자원까지 총동원해 갈아넣는 권위주의적 행태라는 지적이 나왔다.
잼버리 대회 기간 행안부·기재부 등의 지시를 받고 뒤늦게 차출된 국가기관·공공기관 직원들의 ‘앓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국가공무원노동조합·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은 정부가 노조와 아무런 협의 없이 공무원을 잼버리 대회에 ‘강제동원’하고 있다는 비판 성명을 냈다. 공무원노조는 “공무원은 정부 뒤처리 전담반이 아니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자발적 참여”를 강조했으나 K팝 콘서트를 두고도 ‘아이돌 차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K팝 슈퍼 라이브’ 주관 방송사인 KBS의 ‘뮤직뱅크’ 본방송이 취소됐고, 여기에 출연하기로 했던 가수들은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콘서트 담당자 역시 뮤직뱅크 CP(책임프로듀서)로 변경됐다. 성 의원의 ‘방탄소년단 동원’ 발언에 분노한 일부 팬들은 “방탄소년단이 북한의 모란봉악단도 아니고 권위주의식으로 무대에 서라 말라 하는 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③‘주먹구구 행정’ 어디까지
태풍을 피해 전국으로 흩어진 스카우트 대원들의 숙소 확보도 주먹구구식이었다. 서울시는 지난 8일 자치구 등과의 긴급업무협조를 통해 12개 대학 기숙사를 확보해 대원들을 입소시켰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윤승용 남서울대 총장은 페이스북에 “관계기관들은 정확한 도착시간, 도착 후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방 배정을 해야 할 지, 식사는 어찌 제공해야할 지, 머무는 동안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 줘야할 지에 대해 아무런 지침이 없었다”고 적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입국조차 하지 않은 예멘과 시리아 대원들의 숙소를 대학 기숙사 등에 배정하기도 했다. 실제 인원 대신 참가 희망국 자료만 보고 숙소를 배정해 생긴 일이었다. 이로 인해 200만원 가량의 출장뷔페 음식이 모두 폐기됐다. 일부 대학에선 여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숙사층에 남자 대원들을 입소시키려다 학생들이 반발하자 대원들이 다시 짐을 빼 호텔로 이동하기도 했다.
숙소 배정을 두고 자국민 차별 논란도 일었다. 지난 8일 제대로 된 숙소를 배정받지 못한 370여명의 한국 대원들은 경기 용인시 한 교회 강당 바닥에서 별다른 침구 없이 얇은 매트를 깔고 잠을 잤다. 충북 청주의 한 교회에 머물렀다는 한국 잼버리 대원은 “짐을 들고 숙소를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해서 피곤했다”며 “외국인 친구들은 호텔같이 좋은 곳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러웠다”고 말했다.
④여전한 안전불감증
대회 개영 사흘 전인 지난달 29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새만금 현장을 방문해 “이번 잼버리 행사가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준비를 해왔다”고 말했다. 폭우에 일부 야영지가 침수됐고, 연이은 폭염에 숲그늘 하나 없는 간척지에서 대규모 야영행사를 여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지역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나오던 때였다.
잼버리 파행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다.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0월25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배수 문제 해결과 폭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2016년 7월 작성된 잼버리 타당성조사 보고서는 잼버리 개최 시기인 올해 8월 ‘최고 36도에 달하는 고온이 지속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대회의 피날레를 장식한 지난 11일 K팝콘서트 준비 때도 안전은 뒷전이었다. 지난 10~11일 수도권이 태풍의 영향권에 드는 상황이었음에도 콘서트 무대 설치 현장에는 추락 방지를 위한 안전 난간조차 설치되지 않았다. 서울 마포경찰서에는 김 장관, 이 장관 등 잼버리 공동조직위원장 5명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했다는 고발장이 접수됐다.
⑤잼버리가 들춘 지방자치의 민낯?
이번 잼버리 대회를 통해 지방행정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시각도 있다. 전북도가 행사 개최지로 ‘새만금 관광·레저 1지구’를 제안한 것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간척지인 이 땅은 그늘이 없고 습도가 높아 행사장과 야영장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다. 빗물이 빠지지 않은 땅에 야영지를 설치한 탓에 4만여명의 참가자들은 온열질환과 해충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애초 ‘지역 개발’이란 명분에 잼버리 대회를 이용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북도는 2018년 발간한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유치활동 보고서’에서 새만금 잼버리를 ‘전북발전의 지렛대’로 규정했다. 잼버리 유치 배경을 두고도 “전북도는 국제공항 건설 및 SOC 구축 등 새만금 내부 개발에 박차를 가할 명분이 필요했다”고 했다. ‘개발’이라는 부수적 효과에 주로 관심을 쏟은 탓에 정작 행사 자체는 내실있게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자체가 개발논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을 따져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회학자 조형근 박사는 “지자체가 대형 SOC(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개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발전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잼버리 사태가 일어난 전라북도뿐 아니라 가덕도 신공항, 부산 엑스포 등 다른 지역 모두 마찬가지인 문제”라고 했다. 조 박사는 “이거라도 챙기지 않으면 지방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일종의 ‘공포심’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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