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서 수확만 하고 내뺐다…불볕더위 35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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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긴 장마가 지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됐다.
애초 전날 밭에 가 장마철에 웃자란 풀을 잡아주기로 했는데, 더위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열무를 수확하고 남은 밭에 뒤늦게 모종을 낸 애플수박이 기특하게도 열매를 서너 개나 달고 있다.
) 풀 잡을 생각은 아예 접고, 서둘러 수확만 하고 내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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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긴 장마가 지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됐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글로벌 보일링’(끓는 지구)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기후변화로 인한 갑작스러운 추위를 경고한 영화(<투모로우>, 롤란트 에머리히 감독, 2004년)를 본 기억이 있는데, 타는 듯한 더위를 소재로 공포영화를 만든다면 제목을 ‘투데이’로 해도 되겠다 싶다.
“일어났소? 갑시다~.”
2023년 7월30일 오전 9시께 밭장 전화를 받고 짐을 챙겼다. 애초 전날 밭에 가 장마철에 웃자란 풀을 잡아주기로 했는데, 더위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 늦었다 싶기는 했지만, 일단 출발. 전화받았을 때 기온이 25도 안팎이었는데, 밭에 도착하니 차량 계기판 ‘외기 온도’가 30도까지 올라가 있다.
부랴부랴 들어선 주말농장은 말 그대로 ‘풀밭’이었다. 고랑 사이마다 빼곡하게 자란 풀 탓에 걷기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껑충하게 잘 뻗어 자랑거리이던 옥수수부터 살폈다. 장맛비에 반쯤 누워버린 녀석들을 지난주 서너 주씩 묶어 세운 뒤, 묶음끼리 다시 묶고, 밭 둘레엔 울타리까지 둘러줬던 터다. 다행히 무사했고, 수염 색도 제법 짙어졌다.
몇 주째 열매를 내주지 않던 호박도 서너 개 반갑게 얼굴을 내민다. 호박 넝쿨은 염치없이 옆 고랑 작두콩밭까지 뻗어나가 아예 자리를 틀었다. 호박과 호박잎을 숭덩숭덩 썰고 된장을 풀어 끓이다가, 냉동 차돌박이 한 움큼 넣고 고춧가루 한 숟갈 곁들이면 이즈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국밥이 만들어진다.
곧게 뻗지는 못했지만, 허리를 구부린 오이와 가지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호박도, 오이도, 가지도 더위가 심해지면 스스로 성장을 늦춘다는 말을 들었다. 더위가 물러가면 다시 싱그러워질까? 가지치기를 게을리한 방울토마토는 줄기가 여기저기 꺾였어도, 땅에 닿을 정도로 열매가 많이 달렸다. 그나마 쳐준 가지는 옆 고랑에 따로 심었는데, 모두 살아남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시푸르뎅뎅 앙증맞은 열매를 달고 있다.
텃밭 농사 십수 년 만에 최고의 대풍이 든 고추는 풋마름병에라도 걸렸는지 잎사귀가 말려들어가며 시들시들한 녀석 두어 주를 빼고는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벌써 서너 차례 물, 간장, 식초, 설탕(2 : 2 : 1 : 1)을 다시마와 함께 끓여 부어 장아찌를 담갔는데, 몇 번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늦가을까진 너끈하게 든든한 밑반찬이 돼줄 게다.
고구마는 풀을 이기고 순이 더욱 무성해졌다. 군데군데 잎을 뚝뚝 끊어 먹던 손님(고라니)도 더위에 먼 길 나설 엄두를 못 냈는지, 순도 잎도 무탈하다. 열무를 수확하고 남은 밭에 뒤늦게 모종을 낸 애플수박이 기특하게도 열매를 서너 개나 달고 있다. 아직 크기는 작지만 손가락으로 두드려보니 잘 익은 소리가 났다. (집에 와 잘라보니 색깔은 벌겋게 잘 들었는데, 맛은 아직이었다.) 풀 잡을 생각은 아예 접고, 서둘러 수확만 하고 내뺐다. ‘외기 온도 35도’, 차 안이 제일 시원하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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