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조선은행의 만주진출에서 비롯됐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8. 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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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3)

남산에서 내려와 볼까요. 남산을 둘러 돌아 내려오는 길인 소파로와 소월로는 일제가 서울성곽을 허물고 조선신궁 참배길을 만든 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와 시청 방향으로 틀면, 한국은행과 신세계백화점, 서울중앙우체국이 둘러싸고 있는 한국은행 앞 사거리에 닿게 됩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인파가 오갔던 광장이었고, 경성의 경제중심지였기도 했습니다. 지은 지 백여 년이 넘은 근대건축물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중 일부는 온전하게 그 기능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 ‘선은전 광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겠습니다.

혼마치 초입의 경성우편국
선은전 광장에서 경성 최고의 번화가였던 혼마치로 이어지는 입구에는 경성우편국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경성우편국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일본우편전신국이 있었습니다. 진고개 일대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본국과 연락할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인 거류민단 사무실이 있던 이곳에 전신국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근대 우편제도의 도입은 1884년 세워진 우정총국을 시작으로 합니다. 하지만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하였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이후 조선에서는 수년간 우편제도의 도입이 중단됩니다. 갑오개혁 이후에야 제도가 정비되며 우편제도가 부활하였고, 전국에 통신국과 우체사가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되지 않아 1905년 한일통신합동조약이 맺어지며 우리의 체신 업무가 통째로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우정총국은 후에 경성우편국으로 흡수됩니다.

1920년대 경성우편국. [서울역사아카이브]
1910년 조선총독부는 통신관서관제를 재정하여 전국의 우편취급소 및 우편전신취급소를 우편국으로 개편하고 우체소를 폐지, 우편소로 대체합니다. 총독부 통신국 산하의 우편국은 우편, 전신, 전화를 포함한 전반적인 통신 업무를 도맡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경성우편국은 그 중 수장이 되는 우편국으로서, 건물의 규모부터 남달랐습니다. 1913년 착공하여 2년 뒤인 1915년 완공된 경성우편국 신청사는 서구식 돔을 얹고 창을 아치형으로 장식한 지상 3층, 지하 1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습니다.
남대문통에서 바라본 경성우체국(가운데)과 주변 상점가들. [서울역사아카이브]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 체신 및 통신 기구를 자주 정비하였는데, 이는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의병이나 민중의 저항을 저지하는 데에 촘촘하게 퍼진 위 기관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국의 우편국과 우편소가 국고금 수취와 저축 업무까지 함으로서 지방 곳곳까지 효과적인 수탈을 가능케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업고 성장한 조선은행
1910년대 초반 남산에서 바라 본 조선은행 일대 시가지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대한제국시기 근대적인 경제 제도가 유입되며 중앙은행인 대한제국특립제일은행과 금본위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 경제 모두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일본의 방해까지 더해 절차도 제대로 밟지 못하고 무산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은행의 역할을 한 곳은 조선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상업은행인 제일은행 조선지점이었습니다. 1905년부터 일제는 조선의 화폐정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화폐 발권과 국고 관리 업무를 제일은행이 맡게 됩니다.

1909년 통감부는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한국 정부와 일본인이 각각 30%, 68%씩 출자해 자본금 1,000만원의 한국은행을 설립합니다. 한국은행은 제일은행 조선지점의 업무와 역할, 점포와 직원을 전부 승계했습니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한지 채 10개월이 되지 않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일제는 한국의 명칭을 다시 조선으로 환원하기 시작합니다. 1911년 시행된 조선은행법에 따라 한국은행도 조선은행으로 개칭합니다.

1915년 조선은행 본점(왼쪽)과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조선은행 앞 광장과 시가지의 시대별 모습. 왼쪽은 1910년대 후반, 오른쪽은 1939년 촬영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본래 조선은행 본점이었습니다. 1907년 공사를 시작해 1909년 준공한 이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의 신식 건물로 지하에는 대형 금고가, 내부에는 조선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조선은행 본점은 한번에 1,6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던 대형 업장이었습니다. 이곳의 앞길은 ‘센긴마에’라 불리며 당대 일본의 식민지 중 가장 땅값이 비싼 곳으로 거듭났습니다. ‘선은전 광장’이라는 이름도 이 자리에 조선은행이 들어섬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은행권. [한주형기자]
설립 초기 조선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선총독부의 자금 조달이었습니다. 각종 국공채를 인수, 매입하였고 조선의 금과 은을 끌어 모아 총독부의 재정을 도왔습니다.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의 기능을 했지만 동시에 일반 상업은행, 외환은행, 투자은행의 업무까지 했기에 수익을 올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조선은행은 총독부와 재조선 일본인을 상대하는 업무에 주력했고, 정작 조선인들의 접근은 쉽지 않았습니다.

조선은행이 규모를 확장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일본은 만주 점령 야욕을 노골화했습니다. 이 때 침략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은행을 이용합니다. 1915년 조선은행 총재로 부임한 쇼다 가즈에는 ‘조선은행의 역할은 일본-조선-만주를 관통하는 경제 안정대, 소위 엔 블록을 결성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듬해 출범한 데라우치 내각은 더 나아가 ‘선만일체화(鮮滿一體化)’를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하나로 만들어 지배하며 조선은행이 만주의 중앙은행 역할을 겸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조선은행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데, 조선은행은 일찍이 일본 정부에 만주 진출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유출된 일본은행권을 해외 시장인 만주에서 보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주 지역의 일본인이나 상인들에게 조선은행권으로 대출을 해 주고, 회수는 일본은행권으로 하면서 자산을 확보하고자 함이었습니다.

1910-15년 사이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은행 본점(위)과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한국은행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일본은 군벌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중국에서 각종 이권을 제공받는 대가로 특정 군벌을 지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과 차관을 조선은행이 제공했습니다. 1920년대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은행은 점포를 늘려 만주·일본·시베리아·중국까지 진출하였고, 창업 이래 최고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성장합니다. 그중 만주 지역의 점포수는 본토인 조선보다도 많았습니다. 조선은행 내에서도 ‘탈조입만(조선을 나와 만주로 향한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하니, 사실상 이름만 ‘조선은행’이지 ‘만주은행’과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조선은행권은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 화북지역에서 일본은행권 대신 공급되어 통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황기에 만주지역에서 무분별하게 시행된 대출과 불량채권들의 연체로 조선은행은 경영 악화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1920년대 후반 닥친 세계 대공황과 이후 만주에서의 철수는 부실한 조선은행에 2연타를 날리는 격이었습니다. 1932년 만주중앙은행이 출범하고 만주국폐의 금권화에 따라 조선은행권은 1935년 말로서 만주 내 유통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만주 일대의 지점들도 만주흥업은행에 넘어갔습니다. 이 시기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임에도 일본정부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아 연명했습니다.

1920년대 촬영된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왼쪽)과 오늘날의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만주 철수 이후 조선은행은 새 시장을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터진 중일전쟁은 조선은행에 기회였습니다. 일본의 중국 군사 진출이 본격화되며 조선은행은 현지로 송금할 엔화 자금 관리를 맡았습니다. 이처럼 조선은행은 전쟁 비용 조달을 도맡아 했을 뿐 아니라 일본 본토 경제의 방어막 역할까지 했습니다. 일본은 중국 점령지에 경제 사정이 본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까 우려해 자금을 주고받을 때는 가운데서 조선은행을 거치게 하는, 일종의 충격을 흡수하는 ‘범퍼’의 역할로 조선은행을 이용합니다.

1940년대들어 전쟁이 장기화되며 인플레이션이 심해졌고,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통화가 증발했습니다. 일본 본토 인플레이션의 방어선 역할을 한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이나 대만은행권에 비해 월등히 통화 증발 추이가 빨랐습니다. 조선은행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등에 업고 이윤을 창출하고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이를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과 손실, 피해는 결국 식민지 조선이 다시 떠맡아야 했습니다.

<참고문헌>

ㅇ정수진, 「서울의 인문학」, 창비

ㅇ김기호,「서울 남촌 : 시간,장소,사람」, 서울시 간행물

ㅇ차현진,「중앙은행 별곡」, 인물과사상사

<사-연 지난화 보기>

ㅇ사-연 지난화 모음

https://www.mk.co.kr/news/running-story/S00010078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1) / 질퍽대는 동네에 일본인 몰려왔습니다...화려한 불빛이 슬퍼지네요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3740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2) / 일제가 남산에 세운 신궁 허물고...그 자리를 채운게 스키장?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9295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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