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 경계(境界)를 경계(警戒)하는 모듈
'백현진 쑈 : 공개방송' 연출·음악·극작·미술 등 도맡아
9월 1~3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한예리·김고은·장기하 게스트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백현진은 경계(境界)를 경계(警戒)한다. 가수·작곡가, 현대미술가, 배우, 작가이기도 한 그는 쉽게 한계를 분간하지 않는다. 그가 메타포를 조심하는 이유다. 은유, 상징 등 간접적인 해석을 최대한 걷어내기 위해 부단히 설명하고 부연한다.
Z세대는 그를 '프로 엔(n)잡러'라 부른다. 혹은 올라운더(all rounder), '예쁜 육각형'(능력치 그래프의 모든 요소가 꽉 차 있는 모양) 엔터테이너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백현진은 스스로를 '연남동 사는 1972년생 쥐띠 미혼 아저씨'라고 소개를 간소화한다. 그런 생각의 연쇄 작용을 거쳐 축약한 또 다른 수식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 역시 관련된 보조관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모듈(module)도 백현진의 삶과 예술가로서 반경을 압축하는 용어다. 모듈은 한 특성을 갖는 기능 단위로서 부품이자 집합으로서도 운용이 가능한데, 독립적이면서 조직적이다. 홀로 완성도 있는 작업물을 내놓은 개성 강한 예술가이자 그 개성을 드라마·영화에서 잃지 않으면서 협업하는 백현진의 특성이기도 하다.
백현진이 세종 컨템퍼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 23(Sync Next 23)'의 하나로 9월 1~3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펼치는 '백현진 쑈 : 공개방송'은 이런 백현진의 특질이 모두 녹아들어가는 공연이다.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미술, 토크쇼, 낭송, 연설, 음악공연, 토막극 등 20개 파트로 구성된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관계된 모든 것'이다.
배우 김선영·한예리·김고은, 코미디언 겸 배우 문성훈, 싱어송라이터 장기하, 혼성 듀오 'Y2K92'(시모·지빈)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등퇴장한다. 넉넉하지 않은 제작비에 이런 화려한 게스트 라인업을 갖출 수 있었던 비결로 백현진은 '품앗이'를 꼽았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백현진과 나눈 일문일답.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십니까?
"말이 많은 게 전 지겨워요. 가령 냉장고를 통해 생물학, 뇌과학을 끌어들이는데 전 그냥 '냉장고를 열면 시원하다' 정도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상징이나 은유가 없는, 평소 하는 이야기에 이번엔 더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게 없을 때, 각자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죠. 메타포나 상징을 만들어 놓고 언어로 설명하면 정말로 관객이 믿고 보는 것이 나올까라는 궁금증도 있고요. 전 늘 문제의식을 갖고 그걸 경계하고 안 믿는 쪽으로 하려고 하죠. 상징이나 은유, 메타포가 없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어떤 고민으로 이번 쇼를 꾸리게 된 건가요?
"어어부 프로젝트라는 팀을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열심히 했어요. 장영규 씨랑 돈 벌 생각하지 말고 느슨하게 가자며 '조기 축구팀'처럼 운영했죠. 이 팀을 할 때 대중음악 말고, 제가 봤던 현대미술이나 무용 쪽의 다른 요소들이 들어오기를 바랐어요.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2014)이 어어부의 최근 정규 앨범(이 앨범도 14년 만에 내놓은 정규 음반이었다)인데 문성근 씨가 내레이션 하는 사람으로서 극장에 와서 극 형식의 공연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 때 이런 형식이 성에 안 찼거든요. 그러던 작년 '싱크 넥스트'에서 안은미, 어어부랑 공연을 한 뒤 세종문화회관에서 '극을 만들어볼 생각이 있나' 물으셔서 '쇼를 만들겠다'고 했죠. 극이라는 건 이름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스스로에게 가벼워지려고 쇼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낯선 쇼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거죠."
-무대 디자인이나 음악 등 연출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제가 음악가이면, 연출가, 드라마터그죠. 시나리오도 제가 쓰는 거고. 음악감독을 하면서 미술감독도 하는 건데 글을 쓰면서 이런 형태의 작업에 재미를 느꼈어요. 김고은 씨 독백을 정리하다가 음악이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책상에서 음악을 만들어요. 그러면 작품이 선명해지죠.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없는 거예요. 현대미술가, 설치미술가로서 오래 일을 해서 혼자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아는데, 만들어진 것에 대한 느낌을 바로 엿볼 수 있으니까 재밌더라고요. 여러가지 역할을 동시에 운용이 가능하니 편하고 재밌어요."
-다양한 일을 많이 하시는데 작업에 무리가 가지는 않나요?
"무리 없이 일하는 게 저의 큰 방향성 중 하나예요. 또 저 혼자 대부분의 작업을 하니까 효율성과 속도가 다른 작업과는 게임이 안 돼요. 저는 쓱쓱 일을 하는 편이에요. 무리를 하면 즐겁지 않죠. 무리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장수할 거다' 그런 건 아니지만 건강하게 오래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몸이 상하면 안 되죠. 그리고 다른 사람이랑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일 때는 간단하게 소통하고 믿는 편이에요. 물론 저도 까다로운 사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고 싶어하니까 상대방을 택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 디렉션을 거의 안 해요. 그 분들의 재능과 일을 하는 솜씨를 아니까 맡기는 거죠."
-이번 작업의 예산이 많지 않았을 텐데 게스트 출연 라인업이 화려합니다.
"전체 예산 중 출연자들에게 할당되는 돈은 출연하시는 배우 한분의 개런티도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그림을 선물하기로 했어요. 앞서 새소년 황소윤 씨가 제 일을 몇 개 도와줘서 선물을 해야 할 그림이 많아요. 그런데 그 그림 선물을 몇 년 씩 기다린 분들이 많아서 기사가 나가면 '왜 이렇게 안 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웃음) 이런 방법은 홍대 앞 인디 밴드들과 작업하면서 생겨났어요. 시장에서 성공과는 관련이 없는 인디 뮤지션들, 독립영화 쪽 분들과 작업하면서 일종의 '품앗이' 같은 게 생겼어요. 몸값이 비싼 사람이 자기 몸을 사용하게 해주는 대신, 보답할 수 있는 걸로 보답하는 거죠. 시장의 성과랑 관련이 없는 작업을 해낼 때 운용하는 시스템이라고 할까요. 이런 시스템이 잘 자리 잡혀 있어 주변과 유연하게 일을 서로 돕는 편이에요."
-가수, 배우, 화가, 작가인데 현진 씨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을까요?
"'연남동 사는 72년생 쥐띠 미혼 아저씨.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사람이 직업이 많다는 걸 사람들이 조금씩 알게 되면서 엔잡러의 태그가 붙나 보다 생각하죠. 보통 음악가, 작곡가, 작사가 그리고 설치미술가, 화가, 퍼포머로 일할 때는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아요. 라이브를 할 경우엔 오래 같이 움직인 멤버들이 있죠. 예전엔 어어부의 장영규 씨, 방백할 때는 방준석 씨, 지금 벡현진(백현진의 ㅐ를 ㅔ로 바꿨다) 씨 프로젝트에서도 멤버들이랑 같이 움직이고. 영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선 '모든 스태프들에게 깝죽거리지 말고, 조용히 즐겁게 일을 하다 돌아와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요."
-드라마 '모범택시', '해피니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나쁜 엄마' 등 연기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메라 앞에 맨 처음에 선 건 2000년 '반칙왕' 음악에 참여하면서 카메오로 출연한 거였어요. 연기를 드문드문 하기는 했지만, 20년이 지났으니 제법 한 거죠. 많은 분이 알아보시게 된 거 재작년 '모범택시'였어요. 올 겨울 즈음엔 사극에서 왕도 연기할 거 같고요. 일을 할 거면 나름 성실히 해야죠. 재밌어요. 제가 일하는 방식 중 중요한 게 즉흥적인 건데, 연기 할 때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계약 전에 작가님, 감독님과 제가 해야 할 대사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협의하는 거죠. 제가 대사를 일부 바꿔서 할 때 실시간으로 반응이 오는 것도 재밌어요. 연기, 음악, 미술 등의 영역은 다른 거지만 일종의 저라는 시스템이 운용되는 거잖아요. 연기, 음악, 미술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돌릴 때 OS는 저라는 사람이죠."
-특히 괴랄(怪辣·괴이하고 악랄하다의 준말)한 캐릭터를 많이 맡았는데요.
"'모범 택시'를 비롯해 괴랄한 것을 몇 개 했는데, 시장에서 성과가 빌런이 난 거죠. 근데 저 다른 스타일을 많이 했어요. 작년 '고속도로 가족'에서 라미란 씨가 맡은 '엄영선' 역의 남편 역을 맡았는데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반응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제 다 업이죠. 어릴 때 영화 보는 걸 즐겼는데, 좋아한 캐릭터가 B급이었어요. 특히 그런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게 관심이 많았죠. 예를 들면 존 터투로, 스티브 부세미 같은 배우들이요. 제가 톰 크루즈처럼 멋있게 연기하기 힘든 인간이라는 걸 알아요. 저랑 나이가 비슷한 정우성 씨나 브래드 피트 이미지를 제가 갖고 살고자 하면 꼴값밖에 안 되죠. 조연으로 일하는 게 좋아요. 무엇보다 연기를 하면서 좋았던 건 '뱃심'이 생겼다는 거예요. 미술가로서도, 음악가로서도요. 다른 일을 할 뱃심이 생겨 좋아요."
-현진 씨의 즉흥성은 이번 쇼에도 반영이 되는 거죠?
"문상훈 씨에게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문명에 대해서 대화를 하자'가 제안했더니, 바로 오케이를 하더라고요. 역할만 있는 것인데요, 전 게스트이고 문상훈 씨가 토크쇼 진행자죠. 공연 3일 간 매번 다르게 나올 수도 있어요. 또 쇼 장면 중엔 걷는 게 많아요. 패션쇼 런웨이 같은 건 아니지만, S씨어터 무대 전체를 사용하는데 출연자들이 천천히 가로 질러 가면서 걷게 됩니다. 대각선이라는 동선만 정해져 있어요. 천천히 걸을 수도 있죠. 쇼에 정해지지 않은 변수들로 빼곡해요. 그래서 저 역시 쇼가 궁금해요.
-문명에 대해선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나요?
"문명에 대해선 제가 오래 생각해온 것을 쉬운 언어로 풀려고 해요. 문명은 수정, 개선,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변화하고 변경되는 거죠. 그런 부분에 대해 문상훈 씨랑 둘이 얘기를 해봤어요. 전 어떤 사람이 영어 단어를 많이 알게 됐어도 그게 바뀐 거라고 얘기하고, 문상훈 씨는 '발전이라는 말을 그래도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반응하고… 서로 재밌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쇼에서 사용할지는 모르겠어요. 문명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발전·개선·수정은 더 나아진다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이 사람을 힘들게 해요. 전 1995년 첫 공연했을 때보다 지금의 제가 더 향상된 뮤지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때랑 지금이랑 다른 뮤지션이 돼 있는 거죠. 그런 경험한 것을 쇼에서 꺼내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정확히 어떤 걸 얘기하나요?
"'연남동 사는 1972년생 쥐띠 미혼 아저씨' 말고 저를 소개할 때 하는 일이 많다 보니까,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적확한 말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찾은 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대해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이었죠. 현대미술가는 보이는 것, 음악가는 들리는 것을 다루고, 퍼포머와 배우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다루잖아요. 그래서 헛소리 없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어부 프로젝트 신곡 작업은 기대해볼 수 있나요?
"싱글이라도 내자는 것에 대해 동의했어요. 어어부는 말씀 드린 것처럼 조기축구회 같은 팀이라서 느슨하죠. 근데 둘 다 일이 많아요. 한참 붙어 있을 때가 있었지만, 장영규 씨도 저도 가는 방향이 있는 거죠. 하지만 그게 못 만날 방향은 전혀 아니니까 기회가 되면, 같이 음악을 할 수 있어요.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은 중국 옌볜에 가서 일주일 동안 작업을 하고 왔었어요. 근데 이제 마음을 먹어야지 작업이 되는 프로젝트가 됐네요."
-모듈이라는 개념은 현진 씨 삶과 생각에 맞닿는 개념 같아요.
"모듈이라는 개념은 혼자도 되고 같이 붙어도 되는 거잖아요. 거기에 꽂혀 화가로서도 거기에 파고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순서로 따지면 예술가가 있고,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 있고 예술가가 있는 거잖아요. 예술은 삶의 하위 개념이죠. 전 상위 개념에, 즉 삶에 당연히 관심이 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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