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의 유산 '삼해소주', 올곧게 지켜주길
[서형원 <별주막> 대표(ecopol@naver.com)]
끔찍한 상상을 해봤다.
다량의 주정(희석식 소주의 원료인 순도 95%의 에틸알코올)에 약간의 증류식 소주를 섞어 물을 잔뜩 타고 감미료로 역한 맛을 가린, 그런 소주를 삼해소주(三亥燒酒)라고 버젓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 삼해(三亥), 돼지 세 마리를 그려서 라벨을 꾸미고 1000년의 향기라고 적어놓으면 아주 완벽하겠다. 뜻있는 자본이 끼어들어 이런 삼해소주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팔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2021년 여름, 서울시 무형문화재 삼해소주 보유자 김태상 명인께서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 고인이 빚은 70도 삼해소주를 아직 가지고 있는 내게 떠오른 걱정은 앞으로 이 술을 맛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너도나도 삼해소주를 팔겠다고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싸구려 주정을 주재료로 술을 빚어도 전통주 자격과 특혜를 주는, 아무렇게나 술을 빚어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 있는 우리 술의 현실에선 위의 끔찍한 상상이 충분히 현실이 될 수 있다. 세계가 한국의 것에 주목하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은 참 끔찍하다.
올 여름, 고 김택상 명인의 두 동료에 의해 삼해소주가 부활한다니 당장 달려가 이것저것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해소주의 역사적 고향인 마포로 돌아가 농업회사법인과 공방을 차리고 재출시 준비를 마친 김현종, 김하윤 대표를 만났다. 고 김택상 명인의 법적 지위에 의존하던 이 술을 두 사람은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킬 생각일까?
조금 지루하더라도 우선 삼해소주의 긴 역사를 요약해 전해야겠다.
고려에서 오늘날까지, 삼해소주의 역사
소주는 조선시대 사치품의 대명사였고 쌀 모자란 흉년에는 임금님의 명으로 금지되기도 했던 양반가의 독점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소주라는 이름은 아무 재료나 써서 만든 알코올을 사서 물과 감미료를 섞어 파는 최저가 술을 뜻하게 되었다. 병 값이나 술 원가나 그게 그거인 그 소주가 지금은 한류 붐을 타고 한국 술 문화의 상징처럼 세계로 퍼지고 있기도 하다. 세계의 멋진 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소주라는 우리 문화유산은 이름을 잃고 나아갈 자리를 빼앗겼다.
소주 중에서도 삼해소주는 조선시대의 백화점 명품과 같은 술이었다. 당시 우리 술의 주류가 양반가의 집안 술, 즉 ‘가양주’로서 개성 넘치는 수제품이었던데 반해, 삼해소주는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세련된 상품이었다.
1241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특별히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三亥酒)를 가져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술의 역사는 천 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에는 발효주인 청주로 즐겼지만 고려말 몽골 지배기에 증류기술이 들어와 삼해소주가 탄생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가양주로 만들어지다 수요가 늘어나자 조선 후기에는 옹기 굽던 독막(옹막甕幕)이 모여 있던 마포에서 상업적으로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마포 대흥동에서 공덕동에 걸친 ‘독막로’가 바로 그곳이다.
겨울에 사용하지 않는 거대한 옹기 가마는 온습도가 일정하여 술을 대량으로 빚기 제격이었다. 마포나루는 물류 중심지로서 쌀, 술, 땔감 따위를 나르는 데도 유리했다. 한 해 수백, 수천 독을 빚는 기업형 술도가들이 많았다는데, 김현종 대표는 한 업자가 최대 100만 리터 안팎을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해주 100만 리터를 증류하면 삼해소주 30만 리터, 375ml병으로 무려 80만 병이다. 상공업을 홀대한 조선시대에 마포의 삼해주는 흔치 않은 거대산업이었으리라.
오죽하면 영조 9년(1733년) 형조판서 김동필은 "서울로 들어오는 쌀이 삼해주 만드는 데로 쏠려 들어가니 미곡정책상 이를 금하는 것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고, 1794년 정조는 "술은 금지하기도 어렵고 … 삼해주가 이미 다 익었으니 다 빚은 술을 버리게 할 수도 없다"고 했다 하니, 당시 삼해소주의 영향력과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해주는 일 년에 한 번 겨울에 빚는 술이었다. 설 지나 첫 돼지날(亥日)에 술을 빚기 시작하여 36일 후인 다음 세 번째 돼지날, 또 그 다음 세 번째 돼지날에 각각 덧술을 하고 다시 36일을 익혀 완성하는 ‘저온 장기 발효 삼양주(三釀酒)’였다. 108일을 들여 빚은 삼양주를 맛있게 즐기다가 날이 더워지고 술이 쉬어질 것 같으면 소주로 내려서 오래 두고 즐겼을 것이다.
삼해소주는 우리나라 소주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발효하는 술이다. 그만큼 맛과 향이 깊고 풍부한 술이며, 값비싼 명품이었을 것이다. 서울시는 1993년 권희자 여사를 무형문화재 삼해주 보유자로, 이동복 여사를 삼해소주 보유자로 지정했고, 이동복 여사의 아들 김택상 명인이 보유자 자격을 이어 서울 북촌에 <삼해소주가>(三亥燒酒家)를 열었다.
김택상 명인의 삼해소주가는 체험하고 시음하는 공방이었을 뿐 주류제조 면허를 가진 곳은 아니었다. 2016년 김현종 대표가 합류하여 김택상 명인과 함께 <주식회사 삼해소주>를 설립하면서 상업생산이 시작되고 널리 이 술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21년 안타깝게도 김택상 명인이 돌아가시면서 주류제조 면허는 사라졌고, 삼해소주의 판매도 중단되었다.
법에 의한 전통주는 첫째, 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식품명인이 빚는 ‘민속주’, 둘째, 농민이나 농업법인이 지역농산물로 생산하는 ‘지역특산주’를 말한다. 민속주였던 삼해소주를 지역특산주로 되살리기 위해 지난 2년 애쓴 끝에,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삼해소주가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삼해소주는 역사적 고향 마포에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 그 향 그대로, 다시 태어난 삼해소주
- 삼해소주 : 45% 375ml, 250ml
- 삼해귀주(三亥鬼酒) : 71.2% 375ml
- 삼해포(三亥葡, 포도), 삼해홍(三亥紅, 사과), 삼해청(三亥靑, 청수 포도), 삼해고(三亥菇, 상황버섯), 삼해교(三亥蕎, 메밀), 삼해장천(三亥章川, 유자), 삼해귤(三亥橘, 귤), 삼해국(三亥菊, 국화) : 모두 50% 375ml
재료와 제조법 : 밑술부터 증류까지 약 4개월이 소요된다.
- 멥쌀 죽과 누룩으로 밑술을 빚고 5,6일 후부터 약 4주 간격으로 세 번 덧술을 한다.
- 덧술은 1차 멥쌀, 2-3차 찹쌀 고두밥에 누룩, 물을 더한다.
- 청주를 걸러서 숙성 후 동증류기로 증류하고 박막필터로 여과하여 병입한다.
- 삼해귀주는 두 번 증류하여 얻는다. 공개하지 않는 비결이 더 있다.
- 과일은 즙을 짜서, 메밀, 유자, 국화는 차를 만들어서 물 대신 쓴다. 상황버섯은 누룩 딛는 데 섞는다.
김 명인과 함께 회사를 설립하여 삼해소주의 생산과 살림을 전담했던 김현종 대표와, 삼해소주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양조인이자 국가대표 소믈리에인 김하윤 대표가 지난한 과정 끝에 서울의 지역특산주로 삼해소주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다. 김하윤 대표가 새로운 술도가 ‘주식회사 농업회사법인 삼해소주’의 대표를 맡았고, 술 생산만큼 중요한 사업인 삼해소주 아카데미를 진행하는 ‘삼해소주 공방’은 김현종 대표가 맡았다. 아카데미도 술 생산도 두 양조인이 함께 진행한다.
김현종, 김하윤 두 사람은 삼해소주를 처음 만났을 때 반해버린 그 맛과 향을 변화시킬 생각이 없다. 모든 제조법과 장비를 북촌 공방 시절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전통 증류방식을 고수하는 전통주 업체들도 거의 모두 대형 증류기를 도입하고 있지만, 삼해소주는 작은 소줏고리와 유사한 10리터 동증류기를 계속 이용하고 있다. 증류기 크기가 바뀌면 술맛도 바뀐다고 김현종 대표는 말한다. 생산을 늘리려면 증류기 수를 늘려야 한다는 건데, 얼마나 손이 많이 갈는지... 더 넉넉히 생산해서 자주 마실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술꾼의 마음에 살짝 걱정이 깃든다.
알코올 71.2%의 삼해귀주는 두 번 증류한다는 것 외엔 맛의 비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귀주는 삼해소주를 방문해야 구입할 수 있고 한 병 가격이 30만원인데, 술꾼들 사이에서는 소주의 ‘끝판왕’으로 통한다. 지난 8월 1일 삼해소주 10종 시음회가 열렸는데 이 술을 맛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몇 병씩 결제하는 광경을 보며, 약간 충격을 받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술의 자랑은 높은 알코올 도수가 아니라 술맛이다.
포도 소주나 상황버섯 소주라고 하면 보통 소주에 인삼 등을 넣듯 침출하는 술을 떠올리지만 정통의 방식은 그렇지 않다. 술을 빚을 때 물 대신 포도즙, 사과즙, 혹은 메밀차, 유자차를 넣는 방식이며, 상황버섯은 누룩을 빚을 때 섞어 쓴다. 술을 빚고 나서 부재료로 맛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빚는 원재료로 쌀과 함께 쓰는 것이다.
열 가지나 되는 멋진 술을 생산하지만 이들은 생산량을 늘리고 상업적 이익을 취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45% 삼해소주만을 소량 유통시키며, 나머지는 삼해소주를 직접 방문해야 구입할 수 있다. 소주의 원주인 삼해주 청주가 정말 맛있다. 달지 않은데 그윽한 포도향이 난다. 삼해포, 삼해청 등의 원주인 청주들도 재료의 풍미를 잘 살린 멋진 술들이다. 이 술들이 전혀 상품이 되지 않고 소주의 원료로만 쓰인다는 건, 술꾼으로서 너무 마음이 괴롭고 억울한 마음마저 든다.
삼해소주 아카데미 - 술을 빚고 사람을 잇는다.
이 술들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삼해소주 아카데미>에 참석하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밑술을 마련하는 일부터 세 차례 덧술, 증류와 병입까지 약 다섯 달에 걸쳐 진행된다. 두 사람의 안내에 따라 대부분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며, 중간에는 잘 익은 삼해주 청주를 약 6리터, 마지막에는 증류한 소주를 병입하여 또 6리터를 가져간다.
체험과 배움의 즐거움과 보람은 물론이고, 값으로 따지면 참가비의 두 배가 넘는 술을 들고 가는 기쁨에 ‘삼해소주 부자 탄생’ 인증샷을 올려 기념한다. 삼해소주 과정에 한번 참여한 술꾼들은 삼해포, 삼해귤 등의 과정에 또 참여하고, 술 떨어지면 또 참여한다. 2016년에 시작된 삼해소주 아카데미를 거쳐 간 사람들이 600명이 넘고 지난해와 올해 각각 수백 명이 참여하고 있다. 취미로 술에 관심을 가진 술꾼들은 물론, 수많은 양조인들, 연예인들, 언론인들도 이 과정을 거쳐 갔다.
포스터 한 장 만든 적 없고 홍보에 돈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늘 자리가 꽉꽉 차는 아카데미 덕에 삼해소주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자기 손으로 진짜 삼해소주를 빚어본 두터운 팬 층을 쌓아가고 있다.
술도 개성 있는 맛과 향을 가진 음식이었다는 것을 오래 잊고 살았다. 적당히 취하게 해주면 그만, 복잡하게 고를 일도 없었다. 몇 개 기업의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전체 술 소비의 80%를 차지하고, 모처럼 좋은 술을 마신다면, 와인, 사케, 바이주.
100년의 공백을 견디고 부활하는 우리 술에게 술 시장은 철옹성 같다. ‘막걸리가 왜 이렇게 많고 복잡해’, ‘소주가 왜 이렇게 비싸’. 심지어, ‘소주가 깔끔해야지 왜 향이 나’. … 여러분, 술이 원래 그렇습니다.
새로운 삼해소주는 제조법과 맛과 향을 지킴으로써 정통을 이어가고, 아카데미를 통해 술을 빚어보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널리 잇고 있다. 삼해소주는 아카데미를 짬 날 때 진행하는 부가사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비즈니스로서도 술 생산과 못지않게 중요한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프랑스 와이너리와 스코틀랜드의 증류소가 탐방지로 각광을 받는 것처럼 우리나라 농림부는 체험과 탐방의 기회를 제공하는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삼해소주 아카데미는 술을 가장 깊이 있게 술을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 술의 흔들림 없는 중심을 지키고 키우는 좋은 사례다.
필자는 2년 전 삼해소주 아카데미에 참여하여 얻은 삼해소주의 마지막 병을 이 원고을 쓰며 비웠다. 다시 아카데미에 갈 때가 되었다. 소주 외에 다양한 원주들을 맛보고 가져갈 수 있다는 것도 삼해소주 아카데미의 큰 혜택이다. 거의 매달 새로운 팀을 모집하니 기회는 많다.
5개월에 걸쳐 5회 이상 참여해야 하는 아카데미에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 인기 많은 삼해소주 ’불목파티‘나 종종 열리는 시음회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목요일에 열리는 불목파티에는 안주 한 가지를 들고 참여하면 수많은 술들을 맛보게 된다. 무료다!
우리 소주의 기준을 지키고 알리는 일
노트북 빈 화면을 열어두고 재작년 이맘 때 ‘삼해소주 아카데미’에서 내가 빚고 증류한 삼해소주 마지막 병을 꺼낸다. 병에 담기면 바로 팔려나가던 술이라 2년 묵은 삼해소주는 귀하다. 소믈리에 잔에 따라 천천히 서너 번 돌리며 향을 맡으면 고소하고 알싸한 향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달린다. 한참을 지나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그 향기는 다시 코끝으로 나와 간질이고 입 안에서 달큰한 감칠맛과 짜릿한 술맛이 출렁이다 온몸을 덥히며 내려간다.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하는 일이 많은 사회 아닌가 싶다. 아무렇게나 해도 개성이라며 존중해준다. 다양한 것은 좋지만 이름만 근사한 엉터리들이 활개 치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다양성이 큰 사회일수록 기준을 지키고 알리는 이들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소주의 멋과 맛과 기품을 지키고 키우는 삼해소주 두 사람의 역할을 기대한다.
[서형원 <별주막> 대표(ecopo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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