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눈’ 몰고온 초속 20m 강풍에 사과·배 ‘우수수’…비 쏟아져 둑마저 ‘우르르’
1시간당 90㎜ ‘물폭탄’
논밭 대부분 진흙펄 돼
경북 영주·대구 군위
제방 유실로 침수지역 발생
‘쓰가루’ ‘홍로’ 등 낙과 심각
울산 울주
과수원 바닥에 배 나뒹굴어
“저온·폭염 견딘 1년농사 망쳐”
강원 고성
“밤낮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비가 내리더니 결국 삽시간에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어요. 농로도 유실되고 참깨·들깨밭도 모두 망가져 전쟁터가 따로 없어요.”
11일 오전 9시, 강원 고성군 토성면 일대. 제6호 태풍 ‘카눈’이 휩쓸고 간 동네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10일 1시간당 90㎜가량 쏟아진 물폭탄이 마을 전체를 덮치면서 농경지와 주택 대부분은 토사와 쓰레기로 뒤엉켜 쑥대밭이 됐다.
9.91㏊(3만평)에서 쌀과 깨·감자·고구마 등 복합영농을 하는 박용길씨(64·인흥리)는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려 지반이 약해진 탓에 둑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며 “동네며 농경지며 일시에 물이 밀려든 비현실적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인근에서 만난 김홍명씨(61·용암리)도 “무섭게 쏟아진 빗줄기에 급격히 불어난 물이 빠지지 못하고 역류하면서 마을 저지대를 덮쳐 논밭 대부분을 진흙 펄로 만들어버렸다”며 “벼를 수확한다 해도 소출이 3분의 1 정도로 줄 게 뻔해 걱정이 태산”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10일 오후 시가지 전체가 물에 통째로 잠겼던 거진읍 거진리를 찾았다. 주민 박길자씨(79)는 “최악의 물난리를 겪은 터라 정신이 없어 무엇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고, 이젠 빗소리만 들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끝을 흐렸다.
임시 대피소로 이용 중인 현내면 명파리 경로당엔 이재민 30여명이 넋 나간 표정으로 두런두런 모여 있었다. 명파리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한 이재민은 “정든 집이 하루 새 폐허로 변한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며 “이앙기·관리기 같은 농기계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민들은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성군에서 지원금을 약속하더라도 예전 삶으로 돌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김씨는 “정부가 발 빠르게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주민에게 실질적인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고 요청했다.
고성 거진농협(조합장 김경수)도 본점과 하나로마트 일부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봤다. 김경수 조합장은 “이번 집중호우로 주민 시름이 몹시 깊은 상황”이라며 “농협에서도 복구용 장비·인력과 생필품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고성=김윤호 기자 fact@nongmin.com
울산 울주
“일년 농사를 한순간에 망쳤습니다.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10일 오후, 울산 울주군 서생면 일대의 배농가들은 제6호 태풍 ‘카눈’의 직격탄을 맞고 과수원 바닥에 떨어진 배를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서생면은 260여농가가 270㏊ 규모로 배를 재배하는 울산배 주산지다. 농가들은 오전 9시30분경 바람이 갑자기 거세게 불며 배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낙과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농가 장영배씨(65)는 “바람이 수그러들길 기다렸다가 과수원에 나와보니 봉지에 싸인 배가 땅바닥을 온통 뒤덮고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며 “가지에 달려 있던 배 10개 중 4개는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곳 농가들은 9월 중순께부터 수확에 들어가는 ‘신고’를 주로 재배한다. 농가들은 떨어진 배가 아직 맛이 들지 않아 가공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 더욱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결국 낙과 배는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구나 농가들은 “올봄 개화기 때 저온피해를 본 과수를 온갖 정성을 들여 어렵게 살려냈고, 초여름부턴 폭염과 힘겹게 싸워가며 생장 장해를 막기 위해 비지땀을 쏟았는데, 태풍이 덮치는 바람에 모든 게 헛일이 됐다”며 “올해는 호된 ‘삼각파도’를 맞았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울주 서생농협은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난 이날 오후 최남식 조합장을 중심으로 배 과원을 돌며 피해 정도를 조사한 결과 농가별로 20∼60%, 평균 40%의 낙과 피해를 본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배농가들은 대부분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해 그나마 낙과에 대한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최 조합장은 “재해보험 보상 대상이 태풍 피해를 입은 낙과에 한정하는데,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그냥 매달린 배도 봉지를 벗겨보면 상처가 나 대부분 썩게 되고, 가지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려 고사할 수도 있다”며 “농가 피해를 세밀히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주=김광동 기자
경북 영주·대구 군위
“벌건 흙탕물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자두밭을 싹 쓸어버렸어요. 농막은 반쯤 잠겨 버렸죠.”
11일 오전 대구 군위군 효령면 불로리의 침수 피해지역 ‘한들’ 농막에서 흙탕물을 치우던 한 농민은 당시를 회상하며 몸을 떨었다.
10일 오후 ‘한들’ 옆을 흐르던 남천 제방이 유실되면서 주택 10여채와 축사 3동, 농경지, 시설하우스 등이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3억원을 들여 최근 완공한 카페형 창고와 볏논·블루베리밭 등 7000평이 물에 잠긴 은승진씨(43)는 “제방이 터지자마자 신축한 카페형 창고로 달려갔는데 불과 5∼10분 사이 물이 급격히 차오르기 시작했다”면서 “농장 인근 주택에선 기둥을 붙들고 있는 어르신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며 당시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 주민 사이에선 남천 제방 안쪽에 경작지를 조성해 물 흐름을 방해한 것이 제방 유실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대구시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11일 오전 7시 기준 태풍 ‘카눈’에 따른 피해는 군위군 효령면 불로리를 포함해 주택 파손·침수 50채, 농작물·시설하우스 침수 146㏊, 축사 10동이다.
사과 주산지 경북 영주는 낙과 피해가 극심했다. 사과농가 이운형씨(60·부석면 임곡리)는 태풍이 남긴 생채기로 처참하게 변한 과원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11일 오전 찾은 이씨 밭에는 어른 주먹보다 큰 ‘홍로’들이 곳곳에서 나뒹굴었다. 피사의 사탑처럼 비스듬히 누운 사과나무도 종종 눈에 띄었다.
‘카눈’이 한반도를 향해 북상하던 9일 늦은 밤부터 폭우를 동반한 강풍이 부석면 일대를 강타했고, 임곡리·북지리·소천5리 등지 50여농가 과원에서 낙과 피해가 발생했다.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20m/s에 달하는 강풍은 수확 중인 ‘쓰가루’를 비롯해 수확을 앞둔 ‘홍로’ ‘시나노골드’, 만생종 ‘후지’까지 품종을 가리지 않고 떨어뜨렸다.
이씨는 “사과나무 이파리까지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풍이 거셌다”면서 “그나마 요행히 달려 있는 사과도 상품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경북도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11일 오후 3시 기준 ‘카눈’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농작물 침수·낙과·도복 등 652.7㏊로 잠정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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