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고 채수근 해병 유족 앞에서 벌어지는 '천인공노'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 경찰청에 고 채수근 해병 순직 사고 조사 결과를 넘긴 지난 2일 오후, 전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은 고 채 해병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 대령은 "수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시켰다"고 보고한 뒤 "국방부에서 조사 결과를 수정하라고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앞서 유족들께 설명드렸던 그대로 이첩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국방부가 이첩 서류를 회수해 고칠지도 모른다"고 털어놨습니다.
고 채수근 해병의 유족과 박 대령 측의 말을 종합하면 채 해병의 아버지는 "박 대령이 다치는 것 아니냐", "좀 참지 그랬냐"라며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박 대령은 "수근이한테 철저하게 진상 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벌써 직무 정지됐지만 나로선 이것이 최선"이라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박정훈 대령은 국방부의 이첩 보류와 조사 결과 수정 지시가 위법한 직권 남용이자 부당한 수사 개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국방부 지시의 시비를 불문하고, 박 대령은 국방부가 자신을 처벌할 뿐 아니라 조사 결과도 수정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박 대령은 처벌을 각오하고 조사 결과를 경찰에 넘긴 것입니다.
채수근 해병 유족은 왜 해병대를 믿었나
해병대는 고 채수근 해병의 장례를 경북 포항시 오천읍 1사단의 김대식관에서 해병대장으로 치렀습니다. 지난달 20일부터 22일까지 삼일장이었습니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상주로서 사흘 내내 밤낮없이 빈소를 지켰습니다. 채 해병의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고, 조문객들을 일일이 맞았습니다.
사령관은 해병대 전체가 채 해병의 순직에 진심으로 애통해하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줬습니다. "해병대가 존속하는 한 전우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는 전통에 따라 1사단 안에 새로 들어설 신축 건물을 '수근관'으로 명명하도록 했고, 추념비와 흉상 건립도 확정했습니다. 국민 안전을 위해 헌신한 해병들에게 수여할 '채수근상'의 제정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박정훈 대령이 이끈 해병대 수사단은 지난달 28일 유족들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국방장관, 해군 참모총장 보고에 앞서 유족들에게 규명된 진상을 아뢴 것입니다. 해병대 1사단장에서 시작해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부사관의 책임을 가감 없이 들춰낸 조사 결과였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은 말 그대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유족에게 당당한가
"안전한 임무 수행 환경과 장비들을 갖추는 등 강고한 대책을 마련해 '역시 해병대는 다르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해병대 가족의 일원으로서 국민과 함께 해병대를 응원하며 해병대가 더욱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겠습니다."
고 채수근 해병의 유족이 영결식에서 읽은 조사 중 일부입니다. 자식을 앞서 보내는 참혹한 슬픔인 참척(慘慽)은 부모를 잃어 하늘 무너지는 천붕(天崩) 보다 큰 고통이라는데 채 해병의 유족은 의연하게 해병대의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그 부모의 그 자식' 채수근 해병이 어떤 청년이었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가슴에 묻기 더욱 힘들었을텐데 초인적 절제를 보여줬습니다.
이런 유족들이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의 디딤돌로 철석같이 믿었던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에 국방부의 장관, 차관, 법무관리관 등이 왈가왈부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는 경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기초 자료임에도, 국방부는 "경찰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요설로 조사 결과의 수정을 강요했습니다. 박정훈 단장은 그제 기자회견에서 "혐의를 빼라, 혐의 내용을 빼라, 혐의자를 빼라 등 이런 얘기들이 외압으로 느껴졌다"고 못 박았습니다.
보옥 같은 장손과 너무 이른 이별을 한 채수근 해병의 할아버지가 쓴 편지가 지난 10일 이종섭 국방장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컴퓨터에 서툰 구순 다 된 노인이 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에 "천인공노할 일",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담겼다고 합니다. 국방부를 향한 할아버지의 심정이 이와 같습니다.
"오는 25일 국회 국방위 전체 회의만 잘 치르면 한고비 넘긴다"는 말이 국방부 안에서 공공연하게 들립니다. 국방부 대변인실의 당국자들은 논리를 가다듬어서 "박 대령이 항명했고, 박 대령 진술에 거짓과 허점이 많다"며 기자들을 개별적으로 공략하고 있습니다. 염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고 채수근 해병과 유족들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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