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게 정돈된 책…이면에 감춘 시대적 불안
책가도
조선 후기부터 ‘책장 그림’ 유행
화가 집안 명예회복 ‘책가문방도’
2020년 이돈아 작 ‘시공연속체’
‘병환 중’ 어머니에 그리움 담아
조선 후기에는 책과 물건을 그리는 책거리가 유행했다. 그중 책장(서가)에 집중한 그림이 책가도였고, 책가도엔 책뿐만 아니라 도자기·문방구·향로 등의 갖가지 기물도 담겼다. 책가도는 2014년 영화 ‘역린’에도 등장한다. 당시 정조를 연기한 배우 현빈의 상체 노출이 화제였으나 나의 시선은 그의 근육 너머 책가도로 향했다. 정조가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공적인 자리의 어좌 뒤로 책들이 가득하다. 실제 책이 아닌 그림이었다. 정조는 어좌 뒤에 왜 책가도를 두었을까.
정조가 쫓아낸 궁중화가
고아하고 반듯하다. ‘책가문방도’ 8폭 병풍에 대한 첫 느낌이다. 여덟폭으로 나뉜 3층의 책가에 칸칸마다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어둡지만 차분한 갈색 톤은 정돈된 책에 기품을 더한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보인다. 당시 궁중 화가였던 이형록의 작품이다. 조선 최고의 책거리 화가로 평가받는 그가 19세기 중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책가문방도’는 특히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조는 재임 시절 자비대령화원을 왕의 직속으로 두었고, 화원들은 이곳에서 책거리를 그렸다. 권고가 아닌 의무였다. 이형록의 가문은 유명한 화가 집안이었지만 조부 이종현은 정조의 노여움을 사 자비대령화원에서 쫓겨났다. “마땅히 책거리를 그려내야 되는 것이거늘 해괴한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였다.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를 어좌 뒤에 두는 관례를 깨고 책가도 병풍을 세웠던 정조였다. 할아버지와 달리 ‘책가도를 잘 그려내는 것’. 이형록에게는 생존의 문제였다.
“일이 많아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책가도를 보며 마음을 푼다.” 정조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말년에도 힘겹게 책을 폈다. 애착에서 한발을 옮기면 집착이 되고 모든 집착은 결핍에 기인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했던 그다. 불안은 평생토록 그를 따라다녔다. 죽기 직전까지 책에 몰두했던 건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불안함을 안고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형록과 정조를 알고 다시 ‘책가문방도’를 본다. 슬프고 애처롭다.
‘책가문방도’ 속 서가 안에는 여러 기물이 배치돼 있다. 향로 같은 고동기(구리로 만든 옛 그릇)와 꽃병, 주전자와 잔은 흘깃 봐도 고급스럽다. 교양을 뽐내는 듯한 수석과 수선화·잉어 모양의 장식물은 이국적이고 독특하다. 붉고 옅은 분홍의 색조, 꽃봉오리와 잎사귀의 형태를 살린 화분과 식물들은 여유 있는 분위기를 자랑하는 선비의 사랑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섬세하다. 특히 도자기는 고대의 청동기를 재현했다는 게 연구자들의 견해다. 당시 청나라 궁중의 취향이었고 조선 문인들은 이를 모방했다. 외국에 대한 흠모와 명품에 대한 선호. 어느 시대에나 상류 계층에서 시작되는 유행은 그 양상이 비슷하다. 과시와 허세의 형태를 띠고 우아한 척하는 기물들에 새겨진 세속적 욕망이 보인다.
정조 이후인 순조 시대를 살았던 이형록은 책가도 속 고급 기물들을 실제로 보았을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자비대령화원의 근무처는 규장각이었고 자연스레 고위 관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화원 화가들은 시험을 보고 높은 점수를 받아야 승진이 가능했고 녹봉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왕과 사대부의 마음에 들어야 했음은 당연하다. 이형록은 집안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큰 숙제도 안고 있었다. 왕의 개인적인 취향을 적극 고려하고 고위 관료의 문방애완 취미도 담아낸 맞춤 책가도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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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닫힌 시공간
2020년 코로나19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제주 서귀포 미술관에서 일할 때였다. 서울로 가는 하늘길이 닫혔고 미술관은 문을 닫았다. 전시실에 걸린 작품을 오롯이 나만 볼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호사였다. 고립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유튜브에서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Space Time Continuum’ 그림을 보았다. 세련된 작품명과 달리 책거리 그림과 닮아 있었다. 조선시대 책거리를 그릴 때 자주 사용했던 부드러운 갈색 톤의 책들과 네모난 칸들의 배열을 이 그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옛날 책가도와 비슷해 관심이 갔지만 이내 새로움을 발견했다. 전통적이고 안정된 갈색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어둡고 진한 남색의 색조를 바탕으로 불빛이 하나하나 새어 나오는 고층 빌딩들이 캔버스의 정면을 차지한다. 대도시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화려함이다. 먼 과거로부터 온 듯한 책들과 마천루가 그림 속 각기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어울린다고 말하기에는 기이하다. 현실적이기도 우주적이기도 하다. 반짝거리지만 왠지 모르게 고독하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감정의 이유를 찾았다. “뉴욕의 빌딩들을 그리며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달랬다.” 2020년 작가의 어머니는 큰 수술을 받은 뒤 미국 뉴욕의 요양원에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을 그림에 쏟았다. 제멋대로 그려진 사다리꼴 도형과 비뚤어진 건물은 불안한 작가의 심리를 드러낸다. 이돈아 작가는 옛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을 차용한 회화와 설치, 디지털 영상 등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몇년간 책가도를 주제로 한 작품도 자주 선보이고 있다. 간절한 바람에 응답하는 듯 과거의 책가도 속 책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위로를 건네듯이. 불가능한 희망과 욕망이 얽히고설킨 현대적 책가도다. 무더운 날들이다. 문득 나의 책가도 속 숨겨진 욕망에 솔직하고 싶어졌다. 조금은 시원해질 듯하다.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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