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국가책임 아직 다툼 중...기업 처벌은 성분따라 갈려

송윤경·김원진 기자 2023. 8. 1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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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퓨 PGH 성분 관련 국가 상대 손배소 현재 2심
22종 제조·판매 기업들, 성분별로 유무죄 갈려
지난해 4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망한 피해자를 의미하는 유골함과 휠체어가 기자회견장에 놓여 있다. | 권도현 기자

[주간경향] 2011년 5월 서울아산병원에 원인불명의 급성 폐렴을 앓는 임산부 환자가 잇따라 입원했다. 모두 6명의 임산부 환자 가운데 1명이 숨졌고 5명의 상태는 위중했다. 그동안의 폐렴 치료법은 잘 통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감염병 공포가 퍼지기 시작했다. 3개월 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이 질환의 ‘원인’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아닌 가습기 살균제였다. 지난달까지 최소 5082명의 사상자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가습기 물통에 물과 함께 부어 사용하는 살균제는 다른 나라엔 없는 한국 기업의 ‘발명품’이었다. 가습기 살균제는 1997년 최초 출시된 이후 2011년 판매 중단되기 전까지 연간 60만개가 팔렸고, 시장규모는 20억원에 달했다.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국가와 소비자의 안전을 뒷전을 둔 기업의 행태는 2011년 산모·영유아 사망을 계기로 정부가 역학조사를 벌이고 나서야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방의 세월호’라 불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확인된 지 12년이 흘렀다. 그간 국가와 기업은 각각 어떤 법적 책임을 졌는지를 살폈다.

■국가는 법적 책임이 없을까?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국가는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법적 판단은 2016년 11월 단 한 차례 나왔다. ‘세퓨’라는 업체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해 1~2세의 자녀들이 숨지거나 가족이 위중한 폐질환을 얻게 된 이들은 2014년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은 세퓨 가습기 살균제 성분 PGH의 유해성 심사 과정에서 환경부가 흡입독성 자료는 요구하지 않아 이 성분을 유해물질로 지정하지 않은 점, 보존제로 허가를 받은 뒤 다른 용도(에어로졸로 흡입되는 가습기 살균제)로 판매됐음에도 규제가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의무는 없다고 봤다. “가습기 살균제를 유해물질로 지정해 관리하지 않은 데 대해 주의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살균제 관련 제도 미비로 인해) 유해성을 확인해야 할 의무나 이를 확인할 제도적 수단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피해자들은 항소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①세퓨 가습기 살균제 성분에 대한 국립환경과학원의 유해성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는가 ②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검증할 제도적 수단이 당시 공산품안전법상으로는 없었는데, 이 같은 제도 미비에 대한 국가 책임은 없는가 ③정부의 유해성 심사가 제대로 법령에 따라 바르게 이뤄졌다 하더라도 유해성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든 ‘제도 미비’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없는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변론을 맡은 이정일 변호사는 “환경부는 당시 법령에 따라 유해성 심사를 했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조사결과를 사참위가 내놓은 바 있다”면서 “이 조사결과를 세퓨 가습기 살균제 성분(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가 쟁점 중 하나인데 마지막 변론에서 적용이 된다는 점을 논증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세퓨 외에 다른 업체의 피해자들도 국가 상대 손해배상을 제기했지만, 아직 1심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정부가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전면 부정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당선 직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국가 차원의 사과를 하고 피해자 지원 확대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법정에서는 손해를 배상할 법적 책임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성분 따라 운명이 갈렸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 살균제는 모두 22종이다. 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유통한 기업들엔 책임을 얼마나 물었을까.

형사재판에서 기업들의 유무죄는 성분에 따라 갈렸다.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하거나 판매한 옥시레킷벤키저, 롯데마트, 홈플러스 관계자들은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이 판매한 가습기 살균제에는 독성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 담겼다. 옥시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은 2001년에서 2011년 사이 415만여개가 팔렸다.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는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의 제조법을 그대로 따라 PB 상품을 만들었다.

재판부는 옥시와 롯데마트·홈플러스가 판매한 가습기 살균제에 담긴 PHMG가 피해자들의 건강 피해에 영향을 미쳤다는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제작사가 안전성 검토를 미흡하게 했거나 위험성을 알고도 개선하지 않은 ‘주의의무 위반’ 또한 재판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들에게 적용한 주요 혐의는 업무상 과실치사상과 표시광고법 위반이었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의 성립 조건인 ①제조사의 주의의무 위반 ②제조사의 행위와 건강피해 사이 인과관계 인정이 모두 충족돼 나온 결과였다. 일부 피고인들은 “인체에 안전한 성분 사용”, “아이에게도 안심” 등의 문구를 사용해 판매한 혐의(표시광고법 위반)도 인정됐다. 신현우 전 옥시 대표(징역 6년), 김원회 전 홈플러스 본부장(징역 4년), 노병용 전 롯데마트 본부장(금고 3년) 등은 2018년 1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반면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는 1심 형사재판에서 제작사인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전직 임원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1심 재판부는 흡입 독성물질과 이용자들의 건강 피해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가 흡입 독성물질(CMIT·MIT)과 건강피해 사이 인과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기업들이 안전성 검토를 충분히 했는지, 위험성을 알고도 판매했는지 등은 판단하지 않았다. 흡입 독성물질과 건강피해 사이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혐의 적용의 전제 조건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의 주의의무 위반까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는 취지였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진행 중이다.

형사재판과 별개로 피해자들이 기업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대부분 제조물책임법에 근거한 이들 민사소송은 형사소송에 비해 법원에서 요구하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건강피해의 인과관계 입증 책임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피해자들의 입증 책임 부담을 다소 줄이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안이 2020년 3월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지난 7월 기준으로 옥시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340명이다. 소송 건수로는 105건이다. 과거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등급을 1~4등급으로 나눴을 때 3~4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이 주로 소송에 나섰다. 지난해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이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손해배상 소송이 최근 1년 사이 50건 넘게 늘어났다고 한다. 옥시 측은 “1~2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과는 대부분 합의를 통해 배상을 마쳤다”고 밝혔다.

SK케미칼의 가습기 메이트 이용자들도 SK케미칼(SK디스커버리)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지난 3월 기준 피해자 346명이 SK케미칼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 5월 소송이 시작됐는데 아직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는 소송이 일시 정지된 ‘기일 추정’ 상태다. 손해배상 소송은 형사소송의 형이 최종 확정된 뒤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애경산업에도 22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돼 있다. 소송의 원고는 모두 565명이다. 애경산업은 금감원 전자공시스템에 소송 사실을 알리면서 ‘현시점에서는 소송결과 및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음’, ‘회사 경영 및 실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사전 준비 중’이라고 적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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