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한계’만 캐묻는 변호인…법정에 선 과학, 또 ‘오역’될까[SK 가습기 살균제 재판]
[주간경향] 지난 6월 8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50여명이면 꽉 들어차는 재판정은 후텁지근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재판이 저녁까지 계속되자 방청객들은 하나둘씩 입을 가렸다. 하품은 전염병처럼 퍼졌다. 방청석에까지 앉아 있던 변호인들은 팔짱을 낀 채 졸았고, 검사들은 땀이 흐르는지 자꾸 옷을 매만졌다. 증인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판사가 말했다. “증인을 비롯해 모두 힘드시겠지만, 재판의 중요성을 감안해 조금만 힘을 내주십시오.” 1994년 출시 이래 1148명이 숨져 ‘안방의 세월호’라 불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실규명의 여정에서 만난 뜻밖의 적은 ‘졸음’이었다.
서울고등법원에서는 2021년 5월부터 28개월째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 살균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피고인은 세 기업의 전직 임원 13명, 주요 혐의는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는 것(업무상 과실치사상죄)이다.
피고인들은 2021년 1심에선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이 만들고 유통한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천식 간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재판부는 해당 살균제와 건강피해의 관계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연구 23건을 판결문에서 언급하면서 인과관계 입증에 성공한 연구는 단 한 건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연구의 한계가 명백하다는 이유였다. 연구를 수행했던 학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반박했다. “연구의 맥락은 사라지고 몇 줄 한계점만이 선택됐다”, “재판 대상이 ‘피고인의 잘못’이었어야 했는데 ‘과학의 한계’로 바뀌었다.” ‘확신’을 주는 연구가 없었다는 재판부 논리에 학자들은 “재판부가 요구하는 확신은 신앙이나 종교의 영역이지 과학은 아니다”라고 맞섰다.
그후 2년이 흘렀다. 법관과 과학자는 이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됐을까. 항소심에서도 대규모 변호인단은 ‘모든 연구에 의심을 품게 하라’는 1심 때의 전략을 되풀이했다. 60명의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이 전략을 끈질기게 수행하는 과정은 역대급 폭염과 맞물려 졸음을 몰고 왔다. 법정을 휘감은 졸음은, 분명한 것도 혼란스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기업 변호 전략에 대한 은유 아니었을까.
‘법정은 과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SK·애경·이마트 가습기 살균제 재판. 주간경향은 1심 무죄 선고 분석(2021년 2월 1일·1413호)에 이어 지난 4월 27일과 6월 8일·22일 지켜본 항소심 현장을 전한다. 모든 연구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변호인단이 지루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법정 풍경은 재판에서 과학을 다루는 더 생산적인 방식은 없는지를 묻게 한다. 앞으로 법원이 유해 화학물질 소송에서 과학적 증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쟁점도 함께 살폈다.
■법관은 100%를 원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 기업 측 변호인(변호인): 환경노출조사에 조사자의 편견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닌가요?
김재용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연구부장·예방의학 전문의(증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피해를 입었다고 정부에 신고하면 ‘환경노출조사’를 받아야 한다. 조사원이 신고인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 집안 환경 등을 관찰하고 설문조사를 실시해 노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정하는 조사다. 신고자는 이외에도 병원에서 병리·영상 등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변호인은 환경노출조사에 조사원의 편견이 개입될 가능성을 묻고 있고, 증인은 배제할 순 없다는 ‘원론’을 답했다.
변호인: 증인도 신고자 정보는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죠. 원심(1심)에서?
증인: 네.
변호인: (중략) 박동욱 교수 아시죠?
증인: 네.
변호인: 박동욱 교수가 원심에서 (환경노출조사는) 진술에 의존한 조사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왜곡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증인: 동의하는데, 분석결과를 보면 10~15년 전 병원 외래를 다녀온 것까지 딱 맞았습니다. 노출조사에서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 시점) 진술과 객관적 내원 기록을 맞춰봤더니 상당히 맞았다, 오히려 조사가 잘 이뤄졌다는 사후적 확신을 얻었습니다.
변호인: (중략) 박동욱 교수님이 증언하셨어요. 이런 내용 모르세요? 조사자가 편견을 가지면 실제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죠?
증인: 그럴 가능성 배제할 수 없죠.
박동욱 교수는 환경노출조사의 신뢰성에 의심을 품고 있는 학자일까. 1심 재판에서 무슨 말을 했길래 증인 공격의 수단이 된 걸까. 주간경향의 질문에 박 교수가 답했다. “환경노출조사를 비롯해 (사람을 대상으로 한) 모든 조사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완벽하게 이것이 진리’라고 얘기하긴 어렵다고 한 걸 (그 부분만) 잘라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환경노출조사에 일부 불확실성은 있는데. 전체적인 경향을 보기에는 충분하다’였어요. 특히 아주 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의 기억은 비교적 정확하다고 했죠. 모든 질문이 ‘100%냐, 아니냐’는 식이니까 당황스럽더군요.”
변호인단에게 지난 1심에서의 승리는 모든 연구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존 전략이 옳았다는 ‘학습효과’를 안긴 것으로 보인다. 광장·지평·태평양·대륙아주 등 대형 로펌에서 나온 60명의 변호인은 증인으로 출석한 학자들에게 “연구에 한계가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들으려 압박하고 떠보는 식의 질문을 수십 차례 반복했다. 방청석에선 “아우, 또 저러네”라는 짜증 섞인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
■연구를 종합하는 대신 ‘각개격파’했던 1심
연구·조사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수준의 한계라면 변호인단이 굳이 강조해봤자 ‘헛수고’ 아닐까. 재판부도 감안해 판단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SK·애경·이마트 가습기 살균제의 1심 재판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1심은 2016년 피해신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결과에 대해 “응답자 21%가 (어떤 브랜드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는 이유로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설문이 가습기 살균제 사용 시점으로부터 5~22년이 지난 뒤에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고도 볼 수도 있다. 재판부가 각 연구의 한계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다만 2심 재판부의 태도가 1심 때와는 다르다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의 서승렬 부장판사는 변호인이 증인에게 억지로 특정 답변을 받아내려고 질문을 반복할 때마다 “자, 자 그만합시다”,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며 변호인의 ‘물고 늘어지기’를 멈추게 하고, 재판부가 이해한 양측의 입장을 동등하게 요약했다.
“항소심을 앞두고 정부와 학계가 그간의 역학 연구결과들을 ‘법정의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김재용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연구부장)는 점을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역학은 다양한 인구집단의 질병 발생 원인을 추적하는 학문으로, 동물실험이나 노출재연시험과 달리 ‘사람 대상 조사’가 기반이다. 미국에선 1960년대부터 역학 연구를 법정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했고, 어떤 역학 연구가 ‘인과관계 증명’에 성공했다고 봐야 할지에 대한 평가 기준을 마련해 발전시켜왔다. 그중 최근에 마련된 기준이 ‘GRADE 체계’다(각 연구결과의 장점과 단점에 +1, -1 등의 수치를 부여해 합산하고, 최종 1~3등급을 매긴다). 1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 이후 국립환경과학원에 꾸려진 ‘역학적 상관관계 검토위원회’는 ‘GRADE’ 기준을 적용해 역학 연구들을 평가한 결과를 재판부에 제출한 상태다. 몇 가지 한계 때문에 연구의 의미가 폐기되는 일을 막기 위한 대책이었다.
■‘실험실 과학’ 집착, 항소심에선?
동물실험에 지나치게 매달렸던 법원 태도가 항소심에선 달라질지도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이다. 1심에서 재판부와 변호인단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폐손상과 천식’의 인과관계를 완전히 규명하기 위해선 실험실에서 실제와 유사하게 재연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한 마디로 “실험실 과학에 대한 집착”이었다(강태경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등 4인, ‘과학적 증거와 인과관계 판단 기준 연구: 유해 화학물질 사건을 중심으로’).
이런 태도 탓에 1심 재판부는 역학연구의 인과관계 증명력을 낮게 평가했다. 그렇다고 ‘실험실’에서 진행된 각종 독성시험·노출재연실험의 의미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 가습기 사용환경을 생각할 때 실험조건이 가혹했다”는 이유를 들어 일련의 실험·시험 연구를 모두 ‘기각’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에 따르면 ‘가혹 조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수개월 혹은 수년간의 가습기 살균제 흡입을 실험실에서 재연하기란 불가능하다. 실험실 쥐와 인간의 종간 차이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살균물질로 인해 폐손상·천식이 일어나는 ‘기전’을 파악해야 할 때는 일단 손상이 일어날 때까지 농도를 높여가며 실험을 할 수도 있다. 학계엔 이처럼 각 실험의 목표에 따라 실험조건을 얼마만큼 강화해야 하는지에 관한 체계가 이미 정립돼 있지만, 1심 재판부는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변호인단은 6월 22일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도 실험의 ‘가혹 조건’을 파고들었다. 변호인은 실험 조건(살균물질의 노출 정도)이 실제보다 강도가 높다는 점을 강조하고, 증인은 오히려 ‘실제’가 실험보다 더 고강도였을 수 있다는 점을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장기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변호인: 증인은 ‘일반적으로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인체 노출은 장기간 반복 사용에 의해 이뤄지므로 실제 폐에 남아 있는 살균물질(CMIT·MIT)의 양은 본실험에서보다 훨씬 더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논문에 기재하셨죠?
전종호 경북대 응용화학공학부 교수(증인): 네.
변호인: 실험은 한 번에 노출이 이뤄지기 때문에 장기간 반복 사용한 것보다 (살균물질에 노출되는 양이) 적다는 논리인가요.
증인: 그렇죠.
변호인: 그런데 진행하신 실험은 농도가 굉장히 높고, 초고농도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실험 때 투여된 양은) 폐의 정상적인 청소 능력(회복 능력)을 초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는 비록 장기간 반복 사용한다 할지라도 저농도이기 때문에 폐의 청소 능력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증인: 일단 제가 한 실험에 대해서 초고농도로 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고요, 그 연구기법이 제가 설정한 것도 아니고, ‘많이 넣어주세요’ 요청한 것도 아니고 이미 30~40년 전부터 나와 있는 (연구기법상의) 용량의 절반을 쓴 것이고요. 그다음에 (폐의 청소 능력을) 오버한다? 도대체 얼마만큼 오버한다는 겁니까?
변호인: (중략) 인체에는 손상을 회복하는 능력(여기에서는 앞서 말한 폐의 청소능력을 의미)이 있다고 의사들이 원심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증인: (중략) 손상은 당연히 회복되겠죠. 그렇지만 손상되는 속도와 회복되는 속도가 비교해봤을 때 손상 속도가 빠르다면….
변호인: 그 속도를 비교한 연구가 아무것도 없고, 데이터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애초 전종호 경북대 응용화학공학부 교수는 왜 항소심 증인으로 채택됐던 걸까. 앞서 1심 재판부는 SK·애경·이마트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과 건강피해 간 인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3가지 기준이 충족돼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CMIT·MIT가 폐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하고 ②CMIT·MIT가 흡입으로 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하며 ③폐에 도달해 폐질환을 일으킬 정도로 양이 축적돼야 한다. 1심은 모든 연구가 3가지 조건 중 단 한 가지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전종호 경북대 교수가 이규홍 안전성평가연소 단장과 함께 지난해 수행한 동물실험은 이 같은 1심 논리에 대한 ‘반증’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방사성추적자를 이용해 CMIT·MIT가 비강이나 기도를 통해 폐까지 도달하며, 폐손상을 일으키는 염증도 확인됐다는 결론이 나온 실험이었다.
변호인들은 그러나 실험의 애초 목표(재판부가 제시한 기준의 충족) 대신 ‘실험에서의 살균물질 농도가 폐의 회복능력을 초과하느냐 아니냐’라는 새로운 논점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없어서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 교수는 주간경향과의 대화에서 “저는 물질의 ‘체내 거동’을 연구했는데 변호사는 독성학으로 반박했다. 매우 적절치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법정에 선 연구자는 사방팔방 가지를 뻗어나가는 변호인단의 모든 의심을 해소해줄 의무라도 있는 양 다뤄졌다. 어쩌면 한국의 법정은 과학기술이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심판’을 내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유해 화학물질 소송에서의 과학
2년 전 법원은 인체에 유해한 생활화학제품(가습기 살균제)을 만들어 판 기업에 무죄를 선고했고, 학자들은 판결이 나오자 ‘관련 연구를 오해했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요컨대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 살균제 재판은 우리에게 ‘유해물질 소송에서 법원은 과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학자들은 앞으로 ‘유해물질 소송에서의 법과 과학’을 둘러싸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말한다. 크게 3가지다.
첫째, ‘비특이 질환·특이질환’ 개념을 둘러싼 논란이다. 가령 가습기 살균제와 천식 간 인과관계가 법적으로 인정됐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이후 천식이 발병한 어느 개별 피해자의 ‘인과관계’도 입증받은 것일까. 한국 법원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개별 피해자의 가족력, 생활습관 등 다른 요인들이 천식 발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별도로 증명해야만 ‘인과관계 입증’을 받을 수 있다. 천식이 ‘비특이질환’(다양한 원인으로 발병할 수 있는 질환)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반면 특정 요인에 의해 발생해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대응하는 질환은 ‘특이질환’으로 분류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정 유형의 폐섬유화는 ‘특이질환’이다.
역학계에선 비특이·특이질환 구분법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역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질환은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원인과 결과가 1 대 1로 매칭되는 질환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A로 인해 B가 발병했다는 말은 ‘기여도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예방의학 전문의로, 역학 분야에서 오래 연구해온 김재용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연구부장은 “요즘 역학 교과서에선 특이·비특이 표현 자체를 아예 삭제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해물질 사용 뒤 비특이질환을 얻은 피해자들 앞에 추가적으로 놓인 ‘문턱’이 매우 부당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두 번째 과제는 일관성이다. 법원이 ‘유해물질-질병’ 사이 인과관계 입증에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비판이다. 김재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례에 빗대 설명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에서 콘크리트 몇 개 덜 심어서 붕괴가 일어났는지, 어떤 부분의 교량 점검이 부실해 사고로 이어진 것인지까지 말 그대로 ‘과학적’으로 검증을 하진 않았다. 판사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들의 업무 소홀과 건축물 붕괴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왜 유해물질 소송은 달라야 하는가?”
■과학적 증거 다루는 방법 공부하는 미국의 사법
물론 법과 과학의 긴장 관계가 필연적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판사와 과학자는 각자 기대하는 증거의 수준이 다르다. 과학은 늘 반증 가능성을 열어두고 ‘100%’를 장담하지 않지만, 판사는 다툼이 있는 사실을 ‘확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전제와 불확실성을 열어두는 과학자의 언어는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 천현득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법과 과학 사이의 약간의 미묘한 긴장과 빈틈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과학이 (증거로) 제공하는 것과 법원이 원하는 증거 사이에는 간격이 늘 있게 마련”이라면서 “지금까진 법원 내에서 과학적 증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세심하고 체계적인 논의가 없었는데, 이는 하나의 맹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유사한 문제의식 때문에 1994년 미국의 연방사법센터가 <과학적 증거 참조 편람>(Reference Manual on Scientific Evidence)을 발간한 사례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 편람 작성엔 미국과학회, 미국엔지니어학회, 의학회 등 여러 과학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고, 2011년 ‘3판’이 나오는 등 내용도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법정이 과학적 증거를 어떻게 일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다룰지에 대한 최신 지식이 이 편람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유해물질 소송에서의 ‘법과 과학’을 둘러싼 마지막 과제는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다. 인과관계 입증을 엄격하게 요구할수록 유독한 생활화학제품을 만든 기업에 철퇴를 가하기는 힘들어진다. 결국 현시점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과학적 입증이면 충분하다’는 합의가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애초 우리는 왜 이 복잡한 진실규명의 여정을 시작했는가. ‘원인 미상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점이 확인된 이후 지금까지 12년간 5082명이 사망하거나 질병을 얻었다고 신고가 들어왔으며, 정부가 위촉한 전문가그룹은 그중 5041명의 사망·질환과 가습기 살균제 간 상관성·인과성 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과 과학’에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혹시 생길지 모르는 기업의 억울함을 우려해 100% 확신할 수 있는 ‘인과관계 입증’ 연구가 나올 때까지 연구를 되풀이하고 유죄 판단을 미루려는 것일까. 김재윤 교수는 말한다. “법에 인간을 맞출 게 아니라 법이 인간에 맞춰야 한다.” SK·애경·이마트 가습기 살균제 재판은 ‘인간을 위한’ 결론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SK·애경·이마트 가습기살균제 항소심의 다음 변론기일은 오는 24일 열린다. 선고는 올해나 내년 상반기 중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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