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과학자로서 차별당한다” 노벨상 수상자의 오류 [평범한 이웃, 유럽]

취리히·김진경 2023. 8. 1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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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과학계 내부의 ‘남성 차별’을 언급했다. 성차별은 개선되었으니 학문적 성취만을 기준으로 학자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할까.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와 젊은 연구자들이 참가한다. ⓒThe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웹사이트

콘스탄츠 호수는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3개국과 접하고 있는, 중서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다. 이 호숫가에 자리 잡은 마을 중 하나인 독일 린다우에서는 매년 초여름 유명한 행사가 열린다.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The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린다우 회의)가 그것이다. 1951년 시작되어 7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모임에는 해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30~40명과 젊은 연구자 수백 명이 참가한다. 일주일간 이어지는 강연과 토론에서 수상자들과 차세대 연구자들이 어울려 의견을 나누고 소통한다.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 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노벨상 관련 모임, 국적이나 세대에 관계없이 학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두가 하나 되는 모임이라는 게 린다우 회의의 자랑이다. 그러나 올해 열린 제72회 린다우 회의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평판에 찬물을 끼얹었다.

회의 사흘째인 6월27일, 구조생물학 세션 중 일어난 일이다. 이 세션에는 남성 총 4명이 참가했다. 노벨상 수상자 3명으로 구성된 패널과 진행자였다. 패널 중 한 명은 쿠르트 뷔트리히였다. 1938년생으로 85세인 이 스위스인 고분자 생물리학자는 생물체 속 고분자 단백질 구조를 질량분석법과 핵자기공명분광법을 이용해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와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미국· 한국·중국의 대학에서 연구를 했고, 지금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 교수로 재직 중이다.

뷔트리히는 자신에게 주어진 발언 시간에 토론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린다우 회의 웹사이트에 올라온 녹화 영상에는 당시 일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손에 신문을 들고 연단에 오른 뷔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히도, 이곳에서 과학은 주요 논제가 아닙니다. 남성 과학자로서, 이 회의가 열리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손에 든 신문을 관중에게 펼쳐 보였다. 독일 일간지인 〈슈배비쉐 차이퉁(Schwäbische Zeitung)〉이었다. 지면에는 독일 유전학자인 크리스티아네 뉘슬라인폴하르트(81)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독일인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다. 이 인터뷰에서 뉘슬라인폴하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 “과학계에 여성 숫자를 늘리는 게 중요했고 한동안은 할당제가 유효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지금도 여성 비율이 낮긴 하지만 그것은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견디고 매니저 직급을 맡아 일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 “성평등에 대해 너무 관심이 크다. 우리는 성취와 연구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들이 추가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건 모욕적이다”. 뷔트리히는 ‘노벨상 수상자, 여성 할당제에 반대하다:남성에 대한 차별 이끌어’라는 제목의 이 기사를 영어로 번역해 젊은 연구자들에게 나눠줄 것을 린다우 회의 주최 측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제72회 린다우 회의에 참석한 쿠르트 뷔트리히가 “남성 과학자로서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다.ⓒThe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웹사이트

강연과 토론이 끝나고 관중석에 질문할 시간이 주어졌다.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손을 들고 질문 기회를 얻었다. 여성은 뷔트리히를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선 훌륭하고 통찰력 있는 발언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여성 연구자로서, 저는 노벨상 수상자가 남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발언한 점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자 진행자가 끼어들어 이 여성의 말을 막았다. 여성은 목소리를 더 높여 말을 이어갔다. “제 말을 막으려고 하니 불편한 느낌이 더 커지는군요. 말을 끝내게 해주십시오. 개인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직면한 체계적·구조적 차별에 비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스템(STEM, Science·Technology·Engineering·Mathematics: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는요.”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남성 892명, 여성 60명

린다우 회의는 온라인으로 중계된다. 뷔트리히의 발언과 여성의 반박이 담긴 영상은 세션 직후 소셜미디어에서 공유되어 100만 회 이상 시청됐다. “지난 25년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늙은 백인 남성”이라는 둥 뷔트리히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학계의 남성들도 비난에 동참했다. 남덴마크 대학 무쉬타크 발랄 박사는 이런 트윗을 올렸다. “젊은 여성 학자가 뷔트리히의 어린아이 같은 떼쓰기(tantrum)에 맞서자 사회자가 그 여성의 입을 막으려 했다. 성평등 정책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느끼는 남성들은 인터넷의 인셀(incel, ‘involuntary celibates’의 줄임말로 비자발적 순결주의자라는 뜻. 자신은 원하지만 여성과 정신적·육체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여성에게 돌리는 남성들을 칭하는 인터넷 은어)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남성 노벨상 수상자도 그런 식으로 느낀다.”

이 사건 직후 뷔트리히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와 인터뷰를 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추가 설명을 했다. 기자가 '차별당한다고 느끼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할 때였어요. 주최 측이 여성 수상자들에게 맨 앞줄 의자에 앉으라고 했죠.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여성 수상자들은 결국 맨 앞줄에 섰습니다. 그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남성 수상자들은 뒤에 서야 했죠. 여성들이 주목받는 동안 모든 남성 참가자들은 차별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돼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거죠.”

올해 린다우 회의에 참가한 노벨상 수상자 중 남성은 39명, 여성은 5명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전체로 범위를 확대하면 남성 수상자는 총 892명, 여성은 60명이다. 뷔트리히는 노벨상 수상자 사이에 존재하는 성별 불균형은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 5명이 남성 39명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남성 역차별의 근거였다. 〈사이언스〉는 뷔트리히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이번 일이 학계의 분열(schism)을 나타낸다고 썼다. 학계 원로와 이제 커리어 초기 단계를 밟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 사이가 갈려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 단절이 아니다. 성평등과 다양성, 포용 등의 가치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빚어낸 단절이다.

한 여성은 “여성이 직면한 구조적 차별”을 언급하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The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웹사이트

뷔트리히나 뉘슬라인폴하르트가 대놓고 성평등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들의 입장은 ‘성차별은 개선되었으니 학문적 성취만을 기준으로 학자를 평가해야 한다’는 데 가깝다. 이 의견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세계경제포럼(WEF)은 린다우 회의 직전인 지난 6월21일 ‘2023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경제 참여, 교육, 건강, 정치적 기회 등 4개 분야에서 젠더 격차를 측정해 순위를 매긴다. 젠더 격차 지수는 0에서 1 사이 숫자로 나타나며, 1은 완전한 성평등이 이뤄진 상태를 의미한다. ‘남성 과학자로서 차별받는다고 느낀다’고 했던 뷔트리히의 출신국 스위스는 전체 146개국 중 21위(0.783)를 차지했다. ‘여성 할당제가 남성에 대한 차별을 야기한다’고 했던 뉘슬라인폴하르트의 출신국 독일은 6위(0.815)였다. 스위스나 독일은 105위를 기록한 한국(0.680)에 비하면 성평등 선진국처럼 보인다. 그래서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랬다면 그들은 이 보고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야별 순위를 보면 경제 참여, 교육, 건강 등 3개 부문에서 스위스와 독일은 결코 성평등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유사한 일을 하는 남녀 간 임금 차이를 분석한 ‘임금 평등(Wage equality for similar work)’ 부문을 보면, 독일이 89위(0.606), 스위스는 38위(0.703)다(한국은 76위). 추정 노동소득(Estimated earned income)의 경우 독일은 102위(0.572), 스위스는 103위(0.571)다. 무임금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 비율을 보면, 스위스에서는 여성이 17%, 남성이 11%다. 독일에서는 여성이 16%, 남성이 10%다(한국은 여성 14%, 남성 4%). 스위스나 독일의 젠더 격차 종합 순위가 높은 이유는 그나마 정치적 기회에서 남녀 간 차이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14위(0.491), 독일은 5위(0.634)다.

성차별의 판단 기준은 복합적이다. 남녀 부부가 모두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한다고 해서 이 부부 사이에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다. 증명하기도 까다로운 무임금 가사노동 부담을 여성인 아내 쪽이 훨씬 더 많이 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률에 더 이상 남녀 간 차이가 없다고 해서 성평등한 사회일까. 대학 졸업 후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받는 임금에 차이가 난다면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뷔트리히나 뉘슬라인폴하르트처럼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기득권층이 된 자들이 놓치는 게 그것이다. 뷔트리히는 어쩌면 스위스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1971년 이후 성평등이 이뤄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아직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여성을 앞세우니 분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젠더 격차가 가장 적은 유럽 대륙에서조차도 여성은 교육, 경제 참여 기회 등에서 여전히 남성보다 훨씬 불리하다. WEF 젠더 격차 보고서는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성평등이 이뤄지는 시기를 131년 뒤인 2154년으로 전망하고 있다.

산부인과 회의에 쓰인 남성 몸 이미지

뷔트리히는 성평등 이슈에 과학이 묻힌다며 개탄했지만, 성평등을 요구한다고 해서 과학을 도외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위스 산부인과학협회 회장인 이레네 딩러다인 박사는 2021년 〈스위스인포〉와 인터뷰하면서 터무니없었던 경험을 공유했다. 여성의 출산 과정 중 에피듀럴(하반신 마취제) 사용에 대한 회의를 하는데, 마취과 의사가 남성의 몸 일러스트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지 마취과 의사도 알았지만, 여성 몸 이미지를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과학계의 성 편향은 892대 60이라는 노벨상 수상자 수에서부터 산부인과 회의에 쓰이는 남성 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만연해 있다. 그런데도 ‘남성 차별’ 운운한 노벨상 수상자는 여러 언론과 해명 인터뷰를 하고, 그에 맞선 젊은 여성은 커리어에 미칠 영향이 두려워 이름 밝히기도 거부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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