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니코틴 살해’ 부인, 다시 재판받는 이유 [민경진의 판례 읽기]

2023. 8. 1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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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증거 부족”…징역 30년 원심 파기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니코틴 원액이 든 음식물을 남편에게 먹여 죽음에 이르게 한 30대 여성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을 대법원이 파기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증거만으로는 공소 사실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살인죄와 같이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는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범행 동기와 수단, 범행이 이르는 과정 등 여러 간접 사실을 종합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증명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세 차례 니코틴 원액 든 음식 건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023년 7월 27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쟁점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A 씨는 2010년 5월 남편 B 씨와 결혼해 아들 1명을 출산했다. 2015년부터 내연남 C 씨를 만나기 시작해 2020년께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에 C 씨가 머무르도록 했다. 또 그와 함께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여행을 다녀오는 등 내연 관계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A 씨는 대출 상환 부담과 공방 매출 감소, 각종 공과금 연체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남편이 사망할 경우 사망보험금, 남편 소유 부동산 및 예금 등을 상속받고 C 씨와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평소 피우던 전자담배용 니코틴 원액을 이용해 남편 B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A 씨는 2021년 5월 26일 아침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미숫가루·꿀·우유에 불상량의 니코틴 원액을 섞은 음료를 주고 먹게 했다. 남편이 속쓰림과 오심 증상만 호소할 뿐 사망에 이르지 않자 같은 날 저녁에는 흰죽을 만든 후 그 안에 다량의 니코틴을 넣어 국그릇 반만큼 먹게 했다.

이후 남편은 극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A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A 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에 의해 같은 날 밤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B 씨는 치료받은 후 상태가 호전되자 다음날 이른 새벽 귀가했다. 그럼에도 A 씨는 범행을 멈추지 않았다. A 씨는 집에 도착해서도 다량의 니코틴 원액을 탄 찬물을 다시 남편에게 건네 마시도록 했다. 결국 남편은 이날 새벽 3시께 급성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했다.

A 씨는 남편이 사망하자 C 씨와 함께 거주할 집의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 명의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금융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한 다음 자신이 마치 남편인 것처럼 본인 인증을 거쳐 300만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검찰은 A 씨가 남편 B 씨를 니코틴을 이용해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남편의 사망 전날 아침 ①미숫가루 음료를 먹게 한 행위, 같은 날 저녁 ②흰죽을 먹게 한 행위, 사망 당일 새벽 ③찬물을 먹게 한 행위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해 A 씨를 재판에 넘겼다. 남편 명의를 도용해 대출받은 행위에 대해선 컴퓨터 사용 사기죄를 적용했다.

1심은 공소 사실에 대해 전부 유죄를 인정하고 A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살인 혐의 관련 공소 사실 중 ③찬물을 먹게 한 행위와 컴퓨터 사용 사기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다. 나머지 공소 사실은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응급실에 이송됐을 당시 채취한 혈액은 적기에 확보되지 못하고 보관 기간 경과로 폐기됐다”며 “피해자가 미숫가루 음료나 흰죽을 섭취하고 호소한 증상들이 니코틴 음용에 따른 것이 아닐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배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만 “피해자가 니코틴을 음용한 정황은 응급실에서 귀가한 후 피고인이 건네준 찬물 한 컵을 마신 것뿐이라는 부검의 등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며 “내연 관계 유지나 피해자의 사망으로 취득하게 되는 사망 보험금 등 경제적 목적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2심 재판부는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1심과 마찬가지로 A 씨에 대해 징역 30년 형을 선고했다.

 

 “다른 경위로 음용 가능성 있어”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2심에서 유죄로 판단한 ③ 행위에 대해 “제시된 간접 증거들이 공소 사실을 뒷받침하는 적극적 증거로서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를 유죄로 확신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며 그에 대해 추가로 심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이는 이상 원심의 결론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원심이 증거로 인정한 부검 결과와 감정 의견 등은 남편의 사인이 급성 니코틴 중독이라는 점과 남편이 병원에 다녀온 후 과량의 니코틴을 경구 투여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을 뿐 ③ 행위에 대한 공소 사실을 증명하기엔 부족하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찬물을 준 후 밝혀지지 않은 다른 경위로 피해자가 니코틴을 음용하게 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남편의 체내 니코틴이 최고 농도에 이르게 되는 시각에 휴대전화 로그 기록 등 활동 흔적이 남아 있고 A 씨가 남편에게 건넸다는 물컵에 물이 3분의 2 이상 남은 점도 석연치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니코틴 제품이 피해자를 살해한 범행에 사용된 제품이라거나 그 존재가 피고인의 범행 준비 정황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또 A 씨가 니코틴을 이용해 살인하기 위해 니코틴의 치사량, 구할 수 있는 니코틴 원액 및 희석액의 농도와 사망에 이를 만한 투입량 등에 대한 정보와 분석이 필요한데 검찰은 이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점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내연 관계 유지나 경제적 목적이 살인 동기가 됐다고 볼 정도인지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원심에서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부분을 파기하면서 해당 부분과 경합범 관계에 있는 나머지 무죄 인정 부분까지 전부 파기 환송했다.

[돋보기]
 

 국내 첫 ‘니코틴 살인’, 부인·내연남 무기 징역

전자담배와 일반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은 독성이 강해 살충제로 쓰일 만큼 위험성이 높은 물질이다. 성인은 최소 40~60mg의 니코틴을 흡입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한국에선 2014년 니코틴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살) 사례가 처음 보고됐다.

한국의 첫 니코틴 살인 사건은 2016년 4월 경기 남양주에서 발생했다. D 씨(여성, 당시 40대)와 내연남 E 씨는 D 씨의 남편 F 씨에게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살해했다. 시신 부검 결과 담배를 피우지 않던 F 씨의 몸에서 니코틴이 리터당 1.95mg과 수면제 성분인 졸피뎀이 다량 발견됐다. 두 사람은 F 씨 사망 직후 집 두 채 등 8억원 상당의 재산을 빼돌린 것도 조사 결과 드러났다. 1·2심과 상고심은 모두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둘째 사건은 2017년 4월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했다. 20대 남성 G 씨는 함께 신혼여행 온 부인 H 씨(19세)의 몸에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살해했다. G 씨는 출국 당일 공항에서 1억5000만원짜리 여행자보험에 가입하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현지 경찰에게 “아내가 자살했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부검한 결과 사망 원인은 니코틴 중독으로 밝혀졌다. 한국 경찰도 G 씨의 집에서 범행 계획 등이 기록된 일기장을 발견했고 2016년 12월에도 여자 친구에게 니코틴과 숙취 해소제를 섞은 물을 먹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도 파악했다. G 씨 역시 1·2심과 상고심에서 모두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오사카 니코틴 살인 사건’ 이후 니코틴 원액에 대한 수입 규제는 한층 강화됐다. 관세청은 반드시 향이 첨가된 니코틴 원액만 수입 허가를 내주고 보관·운반·시설 등 46개 유해 물질 취급 기준을 충족한 업체만 니코틴 원액을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시중에선 농도 1% 미만의 니코틴 원액만 판매할 수 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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