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숱한 역경을 극복한 최민규, “농구는 저에게 에너지였습니다”
손동환 2023. 8. 13. 00:13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6월 21일 오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부상’은 농구 선수에게 피할 수 없는 단어다. 그러나 부상을 최대한 피해야, 선수로서의 가치를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다. 코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최민규의 생각도 그랬다. 선수 시절 내내 부상과 싸웠고, 부상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코트에서의 시간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돌아봤다. 지금도 농구와 밀접한 삶을 살고 있다.
‘부상’은 농구 선수에게 피할 수 없는 단어다. 그러나 부상을 최대한 피해야, 선수로서의 가치를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다. 코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최민규의 생각도 그랬다. 선수 시절 내내 부상과 싸웠고, 부상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코트에서의 시간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돌아봤다. 지금도 농구와 밀접한 삶을 살고 있다.
“(김)승현이한테 너무 고마웠어요”
2001~2002시즌. ‘김승현’이라는 혜성 같은 신인이 등장했다. 178cm의 작은 키였지만, 스피드를 이용한 공격 전개와 남달랐던 패스 센스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주도했다.
김승현이 주목받을 때, 자기 커리어를 묵묵히 쌓은 이가 있었다. 김승현과 동국대 동기였던 최민규가 그랬다. 김승현이 등장했던 200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9순위(전체 19순위)로 골드뱅크(현 수원 KT)의 부름을 받았고, 왕성한 활동량과 안정적인 볼 핸들링으로 포인트가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002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9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저 역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심 1라운드 지명을 기대했죠.(웃음) 하지만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고, 제 앞에 있던 3팀이 IMF 여파 때문에 지명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불리더라고요. 너무 얼떨떨해서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친구들이 일어나라고 하더라고요.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던 기억이 납니다.
입단 팀이 골드뱅크였습니다.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주변에서는 “그때 정말 어렵지 않았냐?”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팀에 있던 형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오히려 더 열심히 운동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프로에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열심히 해서 내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다짐했고요.
데뷔 시즌(2001~2002)에는 6경기 밖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경기당 출전 시간도 9분 20초에 불과했고요.
선수 모두가 그랬겠지만, 저 역시 비시즌 때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감독님의 눈에 들고 싶어서, 휴식 없이 운동을 했죠. 하지만 6번째 경기 만에 땀 묻은 코트에 미끄러졌고, 무릎 내측 인대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출전 경기 수가 적었어요.
여담이지만, 동국대 동기였던 김승현이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대학 시절에도 대단한 친구라고 느꼈지만, 프로에서는 모든 팬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요. 그래서 승현이가 좋은 기량을 보여줄 때, 기쁜 마음이 오히려 컸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제일 먼저 전화해준 친구가 승현이었어요. 너무 고맙더라고요.
2001~2002시즌. ‘김승현’이라는 혜성 같은 신인이 등장했다. 178cm의 작은 키였지만, 스피드를 이용한 공격 전개와 남달랐던 패스 센스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주도했다.
김승현이 주목받을 때, 자기 커리어를 묵묵히 쌓은 이가 있었다. 김승현과 동국대 동기였던 최민규가 그랬다. 김승현이 등장했던 200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9순위(전체 19순위)로 골드뱅크(현 수원 KT)의 부름을 받았고, 왕성한 활동량과 안정적인 볼 핸들링으로 포인트가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002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9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저 역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심 1라운드 지명을 기대했죠.(웃음) 하지만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고, 제 앞에 있던 3팀이 IMF 여파 때문에 지명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불리더라고요. 너무 얼떨떨해서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친구들이 일어나라고 하더라고요.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던 기억이 납니다.
입단 팀이 골드뱅크였습니다.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주변에서는 “그때 정말 어렵지 않았냐?”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팀에 있던 형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오히려 더 열심히 운동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프로에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열심히 해서 내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다짐했고요.
데뷔 시즌(2001~2002)에는 6경기 밖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경기당 출전 시간도 9분 20초에 불과했고요.
선수 모두가 그랬겠지만, 저 역시 비시즌 때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감독님의 눈에 들고 싶어서, 휴식 없이 운동을 했죠. 하지만 6번째 경기 만에 땀 묻은 코트에 미끄러졌고, 무릎 내측 인대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출전 경기 수가 적었어요.
여담이지만, 동국대 동기였던 김승현이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대학 시절에도 대단한 친구라고 느꼈지만, 프로에서는 모든 팬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요. 그래서 승현이가 좋은 기량을 보여줄 때, 기쁜 마음이 오히려 컸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제일 먼저 전화해준 친구가 승현이었어요. 너무 고맙더라고요.
신화의 숨은 주역
최민규의 소속 팀인 골드뱅크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코리아텐더가 골드뱅크를 인수했지만, 코리아텐더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월급을 못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구단만큼 풍족한 환경에서 운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텐더는 2002~2003시즌 이변을 일으켰다. 열악한 재정 지원과 부족한 전력에도, 4강 플레이오프에 나선 것. 최민규의 입지 또한 커졌다. 당시 51경기 평균 10분 7초를 소화했고, 데뷔 시즌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았다.
그러나 2002~2003시즌 종료 후 전주 KCC로 임대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최민규는 2003~2004시즌 정규리그 전 경기 출전(54경기)에 경기당 3.5점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로 KCC의 플레이오프 우승에 기여했다.
소속 팀인 코리아텐더가 2002~2003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전)형수(현 명지고 코치)가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이적했고, 가드진에는 (정)락영이형과 (이)홍수형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윤 감독님(현 배재고 코치)께서 수비 위주의 전술을 잘 짜주셨어요.
무엇보다 선수단 모두가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습니다. 코트에 있는 선수와 벤치에 있는 선수가 하나로 똘똘 뭉쳤죠.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출전 시간이 짧았지만, 복귀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큰 의미였습니다.
2002~2003시즌 종료 후 전주 KCC로 임대 트레이드됐습니다.
감독님께서 저녁에 절 부르시더니, “너가 KCC로 잠깐 가게 됐다”고 하셨어요.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전주로 이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웃음)
생생했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너무 떠나기 싫었거든요.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팀원 간의 사이가 너무 좋았거든요. ‘내가 왜...?’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정말 암울했어요.
또, KCC는 (이)상민이형(전 서울 삼성 감독)과 (조)성원이형(전 창원 LG 감독), (추)승균이형(SPOTV 해설위원) 등 탄탄한 멤버를 갖춘 팀이었습니다. ‘내가 저 멤버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컸어요. 겁이 나더라고요.
그렇지만 데뷔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규리그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소속 팀인 KCC는 플레이오프 우승을 차지했고요.
같은 포지션에 있던 상민이형과 고인이 된 (표)명일이형, (전)일우형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리고 KCC가 그때 정말 많은 패턴을 가진 팀이었는데, 당시 코치님이셨던 유도훈 감독님(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준비한 후, 저희 팀이 우승을 했습니다. 저한테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기에, 기억이 더 크게 남아요.
최민규의 소속 팀인 골드뱅크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코리아텐더가 골드뱅크를 인수했지만, 코리아텐더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월급을 못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구단만큼 풍족한 환경에서 운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텐더는 2002~2003시즌 이변을 일으켰다. 열악한 재정 지원과 부족한 전력에도, 4강 플레이오프에 나선 것. 최민규의 입지 또한 커졌다. 당시 51경기 평균 10분 7초를 소화했고, 데뷔 시즌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았다.
그러나 2002~2003시즌 종료 후 전주 KCC로 임대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최민규는 2003~2004시즌 정규리그 전 경기 출전(54경기)에 경기당 3.5점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로 KCC의 플레이오프 우승에 기여했다.
소속 팀인 코리아텐더가 2002~2003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전)형수(현 명지고 코치)가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이적했고, 가드진에는 (정)락영이형과 (이)홍수형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윤 감독님(현 배재고 코치)께서 수비 위주의 전술을 잘 짜주셨어요.
무엇보다 선수단 모두가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습니다. 코트에 있는 선수와 벤치에 있는 선수가 하나로 똘똘 뭉쳤죠.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출전 시간이 짧았지만, 복귀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큰 의미였습니다.
2002~2003시즌 종료 후 전주 KCC로 임대 트레이드됐습니다.
감독님께서 저녁에 절 부르시더니, “너가 KCC로 잠깐 가게 됐다”고 하셨어요.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전주로 이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웃음)
생생했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너무 떠나기 싫었거든요.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팀원 간의 사이가 너무 좋았거든요. ‘내가 왜...?’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정말 암울했어요.
또, KCC는 (이)상민이형(전 서울 삼성 감독)과 (조)성원이형(전 창원 LG 감독), (추)승균이형(SPOTV 해설위원) 등 탄탄한 멤버를 갖춘 팀이었습니다. ‘내가 저 멤버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컸어요. 겁이 나더라고요.
그렇지만 데뷔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규리그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소속 팀인 KCC는 플레이오프 우승을 차지했고요.
같은 포지션에 있던 상민이형과 고인이 된 (표)명일이형, (전)일우형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리고 KCC가 그때 정말 많은 패턴을 가진 팀이었는데, 당시 코치님이셨던 유도훈 감독님(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준비한 후, 저희 팀이 우승을 했습니다. 저한테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기에, 기억이 더 크게 남아요.
피해갈 수 없는 운명
임대 후 원 소속 구단으로 돌아온 최민규는 변화와 마주했다. KTF가 코리아텐더 농구단을 인수했기 때문. 하지만 최민규의 농구는 변하지 않았다. 최민규는 여전히 자기 몫을 묵묵히 해냈다.
그러나 최민규도 ‘은퇴’라는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2010~2011시즌 종료 후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최민규가 KBL에 남긴 기록은 271경기 출전에 697점 264어시스트 253리바운드에 91개의 스틸이었다.
농구단 주체가 코리아텐더에서 KTF로 바뀌었습니다.
좋은 기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수들 모두 기대를 많이 했어요. 이전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이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코리아텐더 시절도 간혹 생각났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어려운 적도 많았지만, 좋은 기억도 너무 많아요. 그때가 훨씬 재미있었고, 선수들의 사이도 훨씬 끈끈했거든요.
2010~2011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제가 못해서 은퇴한 겁니다.(웃음) 다만, 프로에 있는 동안, 몸이 완전했던 시즌이 한 번도 없었어요.
KCC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허벅지 근육이 파열된 채로 KCC에 입성했지만, 참고 뛰다 보니 54경기를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상무에 갔어야 했는데, 아픈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회복무요원을 선택했어요.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였거든요.
2010~2011시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성민이(현 안양 KGC인삼공사 코치)가 국가대표팀으로 차출됐고, 전창진 감독님(현 전주 KCC 감독)께서 저를 주전으로 기용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SK랑 경기 중에 김민수 선수(현 경희대 코치)의 유니폼에 걸려 새끼손가락을 다쳤습니다. 골절이라 3개월을 쉬어야 했어요. 쉬고 돌아오니, 자리가 애매해졌더라고요. 그런 부상들 때문에 많이 아쉬웠습니다.
임대 후 원 소속 구단으로 돌아온 최민규는 변화와 마주했다. KTF가 코리아텐더 농구단을 인수했기 때문. 하지만 최민규의 농구는 변하지 않았다. 최민규는 여전히 자기 몫을 묵묵히 해냈다.
그러나 최민규도 ‘은퇴’라는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2010~2011시즌 종료 후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최민규가 KBL에 남긴 기록은 271경기 출전에 697점 264어시스트 253리바운드에 91개의 스틸이었다.
농구단 주체가 코리아텐더에서 KTF로 바뀌었습니다.
좋은 기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수들 모두 기대를 많이 했어요. 이전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이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코리아텐더 시절도 간혹 생각났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어려운 적도 많았지만, 좋은 기억도 너무 많아요. 그때가 훨씬 재미있었고, 선수들의 사이도 훨씬 끈끈했거든요.
2010~2011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제가 못해서 은퇴한 겁니다.(웃음) 다만, 프로에 있는 동안, 몸이 완전했던 시즌이 한 번도 없었어요.
KCC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허벅지 근육이 파열된 채로 KCC에 입성했지만, 참고 뛰다 보니 54경기를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상무에 갔어야 했는데, 아픈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회복무요원을 선택했어요.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였거든요.
2010~2011시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성민이(현 안양 KGC인삼공사 코치)가 국가대표팀으로 차출됐고, 전창진 감독님(현 전주 KCC 감독)께서 저를 주전으로 기용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SK랑 경기 중에 김민수 선수(현 경희대 코치)의 유니폼에 걸려 새끼손가락을 다쳤습니다. 골절이라 3개월을 쉬어야 했어요. 쉬고 돌아오니, 자리가 애매해졌더라고요. 그런 부상들 때문에 많이 아쉬웠습니다.
은퇴 후
앞서 이야기했듯,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민규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먼저 KBL에서 농구 행정가의 길을 잠깐 걸었고, 현재는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농구 교실 강사’와 ‘해군사관학교 농구 교수’, ‘족발집 사장님’ 등이 최민규의 직함이다.
KBL에서 농구 행정을 잠시 경험하셨습니다.
경기운영팀으로 입사했습니다. 전반적인 경기 운영을 맡는 곳이죠. 하지만 제가 한 일은 크게 없었습니다. 그저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과 합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선수 시절과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농구 관련 업무이기 때문에, 마냥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연맹에서 일하는 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피해야 할 일도 많고, 불편한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KBL 식구들이 너무 잘해줬습니다. 제가 6개월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아직도 연락해주시는 KBL 분들이 계십니다. 또, 저 스스로 농구 행정에 관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렵기는 했지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족발집을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모님께서 오랜 시간 운영하신 가게였습니다. 제가 진해로 내려온 후 장모님을 도와드렸죠. 그렇지만 장모님의 연세가 점점 많아지셨고, 저는 장모님의 가게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았습니다. ‘세대 교체’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웃음)
농구공만 평생 잡았던 걸 생각하면, ‘족발집’은 생소한 일입니다.
그렇죠. 요리를 할 일도 없었고, 고객과 만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수 시절처럼 오전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일했고, 고객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 분들도 저를 진심으로 대해주시더라고요.
농구 관련 일도 아직 하고 계신가요?
KT에서 은퇴한 후, KT 소속 유소년 클럽에서 7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첫 번째 제자가 고려대에 있는 박정환이에요. 그리고 올해 건국대로 입학한 권민준도 오랜 시간 저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아들의 친구들에게 농구를 알려줬습니다.(그 중 한 명이 마산고 2학년인 손현동이다) 재능 기부 형식이었죠. 그러다가 방과 후 수업을 맡게 됐고, 좋은 분을 만나 진해종합사회복지관에서 수업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지금도 주말에는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전에, 해군사관학교 생도들도 지도했습니다. 비록 코로나19와 가게 사정 때문에 잠시 쉬기는 했지만, 올해부터 다시 해군사관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농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직도 눈이 반짝거려요.(웃음)
앞서 이야기했듯,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민규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먼저 KBL에서 농구 행정가의 길을 잠깐 걸었고, 현재는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농구 교실 강사’와 ‘해군사관학교 농구 교수’, ‘족발집 사장님’ 등이 최민규의 직함이다.
KBL에서 농구 행정을 잠시 경험하셨습니다.
경기운영팀으로 입사했습니다. 전반적인 경기 운영을 맡는 곳이죠. 하지만 제가 한 일은 크게 없었습니다. 그저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과 합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선수 시절과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농구 관련 업무이기 때문에, 마냥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연맹에서 일하는 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피해야 할 일도 많고, 불편한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KBL 식구들이 너무 잘해줬습니다. 제가 6개월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아직도 연락해주시는 KBL 분들이 계십니다. 또, 저 스스로 농구 행정에 관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렵기는 했지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족발집을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모님께서 오랜 시간 운영하신 가게였습니다. 제가 진해로 내려온 후 장모님을 도와드렸죠. 그렇지만 장모님의 연세가 점점 많아지셨고, 저는 장모님의 가게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았습니다. ‘세대 교체’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웃음)
농구공만 평생 잡았던 걸 생각하면, ‘족발집’은 생소한 일입니다.
그렇죠. 요리를 할 일도 없었고, 고객과 만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수 시절처럼 오전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일했고, 고객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 분들도 저를 진심으로 대해주시더라고요.
농구 관련 일도 아직 하고 계신가요?
KT에서 은퇴한 후, KT 소속 유소년 클럽에서 7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첫 번째 제자가 고려대에 있는 박정환이에요. 그리고 올해 건국대로 입학한 권민준도 오랜 시간 저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아들의 친구들에게 농구를 알려줬습니다.(그 중 한 명이 마산고 2학년인 손현동이다) 재능 기부 형식이었죠. 그러다가 방과 후 수업을 맡게 됐고, 좋은 분을 만나 진해종합사회복지관에서 수업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지금도 주말에는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전에, 해군사관학교 생도들도 지도했습니다. 비록 코로나19와 가게 사정 때문에 잠시 쉬기는 했지만, 올해부터 다시 해군사관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농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직도 눈이 반짝거려요.(웃음)
“다음 생에는 취미로만...(웃음)”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최민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냐?”고 말이다.
최민규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농구는 지금도 나의 전부이지만, 다음 생에는 취미로만 하고 싶어요(웃음)”라고 이야기한 것. 이유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가족과의 시간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이 그 이유였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코트에서 호흡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았거든요. 한솥밥 먹었던 선배님들과 친구들, 후배들도 많이 생각나고요.
힘들었던 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속에서 인내를 많이 배웠어요. 또, 어떤 일을 하든, 농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그리고 농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제가 힘이 되려고 합니다. 아. 농구의 의미를 물어보셨죠?(웃음) 농구는 저에게 에너지이자 비타민이에요. 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거든요.
‘최민규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농구를 했던 모든 선후배들과 동기들이 “파란만장했다”고 표현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너무 많이 다쳐서, 치료받고 재활했던 기억밖에 없어요.(웃음) 그래서 트레이너 형들한테 너무 감사해요.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취미로만 하고 싶어요.(웃음) 농구를 너무 좋아하지만, 다음 생에는 아이들과 취미로만 농구를 하겠습니다.
이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사람들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고,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서요. 그만큼 가족과의 시간이 저에게 소중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본문 첫 번째 사진)
사진 = KBL 제공(본문 2~4번째 사진, 6번째 사진), 최민규 제공(본문 5번째 사진)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최민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냐?”고 말이다.
최민규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농구는 지금도 나의 전부이지만, 다음 생에는 취미로만 하고 싶어요(웃음)”라고 이야기한 것. 이유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가족과의 시간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이 그 이유였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코트에서 호흡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았거든요. 한솥밥 먹었던 선배님들과 친구들, 후배들도 많이 생각나고요.
힘들었던 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속에서 인내를 많이 배웠어요. 또, 어떤 일을 하든, 농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그리고 농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제가 힘이 되려고 합니다. 아. 농구의 의미를 물어보셨죠?(웃음) 농구는 저에게 에너지이자 비타민이에요. 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거든요.
‘최민규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농구를 했던 모든 선후배들과 동기들이 “파란만장했다”고 표현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너무 많이 다쳐서, 치료받고 재활했던 기억밖에 없어요.(웃음) 그래서 트레이너 형들한테 너무 감사해요.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취미로만 하고 싶어요.(웃음) 농구를 너무 좋아하지만, 다음 생에는 아이들과 취미로만 농구를 하겠습니다.
이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사람들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고,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서요. 그만큼 가족과의 시간이 저에게 소중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본문 첫 번째 사진)
사진 = KBL 제공(본문 2~4번째 사진, 6번째 사진), 최민규 제공(본문 5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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