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길 좇아 ‘곡물과 굶주림의 게임’ 벌이는 푸틴
“서방의 대러 제재가 식량위기 초래”라고 몰아가
(시사저널=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지구촌의 식량위기에 더욱 먹구름이 끼고 있다. 러시아가 7월17일 흑해곡물협정(BSGI) 연장을 철회해 우크라이나 항구가 봉쇄됨에 따라 곡물 가격이 다시 반등하고 있다. 전쟁 전 세계 4위 곡물 수출국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세계 곡물시장에서 러시아와 함께 세계 밀 수출의 30%를 차지한다. 이집트,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중국 등이 주요 수입국으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도 지난해 80%의 식량을 우크라이나에서 구매했다.
8월4일 발표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의하면, 흑해곡물협정 중단 이후 공급 불확실성의 여파로 7월 세계 식량 가격이 반등했다. 국제 가격 변화를 매달 추적하는 FAO의 식량가격지수(123.9포인트)는 7월에 전월 대비 1.3% 상승했으며 특히 밀과 식용유가 눈에 띄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이 악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WFP가 지원해온 아프가니스탄, 지부티, 에티오피아, 케냐, 소말리아, 수단, 예멘 등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전쟁 계속된다면 급성기아 4700만 명 증가
최대 글로벌 식량 지원 기관인 WFP는 이 전쟁이 계속된다면 급성기아가 4700만 명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특히 아프리카에서 가파른 증가율(17%)을 보였다. 지난해 2억7600만 명이 극심한 기아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과 비교해 1억2600만 명 증가한 수치다. 이미 팬데믹과 기후위기로 인해 심각한 식량 불안에 직면한 인구는 2019년 이후 두 배 이상 증가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세계 곡물시장에 공급이 줄어들자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밀 수입 의존도는 57%가 넘는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한 러시아 푸틴 정권은 7월27~28일 열렸던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6개국에 무상 곡물 지원을 제안했으나 반응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그 대상 국가에는 용병 바그너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해온 말리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외에도 친러시아 성향의 부르키나파소와 짐바브웨, 기근이 심각한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가 포함된다. 친러시아 성향인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마저 총회 발언에서 "우리는 '선물'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다"고 꼬집으며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에 복귀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EU 집행위는 푸틴의 흑해곡물협정 파기를 비난했다. 그간 이 협정은 곡물 가격 하락에 큰 공헌을 했고 우크라이나는 올 7월 중순까지 약 3300만 톤을 수출할 수 있었다. 야니스 클루게 경제정치재단 연구원은 독일 타게샤우방송에서 러시아가 곡물 및 비료 수출에 대한 요구 사항이 충족되지 않는다며 협정에서 탈퇴한 것에 대해 "푸틴이 몽니를 부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지난해 러시아의 비료 수출이 증가했고 곡물 수출도 기록적인 한 해를 보냈다는 점,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는 러시아 곡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푸틴의 정치적 의도는 세계 식량위기의 이유가 러시아를 향한 서방의 제재 때문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남반구에 유포하고 유럽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해상봉쇄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막히자 접경국인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항구·철도·육로로 운송을 지원해 왔다. '연대 경로'라고 불리는 이 대체경로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곡물 60%를 소화해 냈지만 여전히 항구 폐쇄의 악영향을 상쇄할 수 없고 단점도 공존한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농민 입장에서는 곡물의 운송시간과 거리가 연장되면서 추가비용은 늘고 수익성은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지난해 3~5월 곡물 수출업자의 금전적 손실은 하루 2억 달러로 추산된다.
아울러 동유럽 현지 농민들과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면도 있다. 동유럽은 우크라이나의 저가 곡물이 급작스레 자국 시장으로 대량 유입되자 현지 곡물 가격이 낮아지고, 자국 내 한정된 곡물 보관시설에 대한 쌍방의 수요가 대폭 늘어나 비용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심화되었다. 국경통관 때 대기시간도 늘어났다. 이에 따른 동유럽 현지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폴란드 농산부 장관의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올해 5월부터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산 밀·옥수수·평지씨·해바라기씨의 판매와 보관은 잠정 금지하고 대신 다른 EU 국가들과 개발도상국으로의 통관만 허용하고 있다.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농업부 장관들은 7월19일 공동성명을 통해 "9월15일로 예정된 판매금지 만료일을 연말로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 파괴 위해 90년 전 스탈린 방법 사용"
시사저널은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지역 농민협회'의 대표인 릴리야 보르티치에게 자국의 농업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현재 우크라이나 대다수 농민은 큰 경제적 손실을 보고 있으며, 아주 극소수의 경우에만 손익분기점을 가까스로 넘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흑해에서의 안보 불안정으로 인한 보험료 증가도 큰 부담이다. 대다수의 농민이 내년에는 생산비용이 더 드는 밀 파종은 포기할 처지에 놓였다"며 "현재 동유럽 농민들은 EU 지원금이라도 받지만,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자국 정부나 EU, 국제기구로부터 받는 지원금이 전무해 겨우 생존하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으로 내년 자국 곡물 수출이 감소해 국제시장에 물량이 급감하면 그 피해는 결국 수많은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동유럽의 판매금지 조치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정치권이 여론에만 휩쓸리지 말고 우크라이나 농업의 현실과 국제사회에 미칠 파장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폴란드의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진보 논객인 아그니에슈카 홀란트는 폴란드 농민들의 반응에 대해 묻는 필자에게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의 침공 초부터 우크라이나인들을 놀라울 만큼 지원해 오고 있지만 그 대가가 비싸지면 연대가 끝날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전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스탈린의 만행을 고발했던 개리스 존스 기자의 실화를 영화화한 《미스터 존스》를 연출한 바 있는데, 지금 푸틴 대통령이 과거 1930년대에 의도적이고 기획된 기근(홀로도모르)으로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을 아사시킨 스탈린의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홀로도모르(Holodomor)는 정치적·경제적·이념적 목표가 있었지만, 결국 우크라이나 농민의 독립에 제동을 걸고, 공포를 퍼뜨려 희망을 죽이고,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주된 목적에서 효과가 있었다. 굶주림은 수십 년 동안 적극적인 저항을 파괴하는 효율적인 도구였다. 푸틴은 스탈린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파괴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다시 곡물과 굶주림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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