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K-99 규명 연구는 남의 떡"…`가두리 환경`에 야성 잃은 과학계

안경애 2023. 8. 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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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구 아이디어 떠올라도 엄격한 연구비 규정이 발목
참신한 연구주제 부상해도 뛰어들기 힘든 분위기 고착
아카이브 통한 열린 소통-검증 못따라가는 '외로운 섬'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LK-99 시연 영상
김인기 보나사피엔스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인도 국립물리연구소의 LK-99 재현실험 영상

"새로운 게 나타나면 카우보이들은 자신의 돈을 들여 리스크를 감수하고 연구에 뛰어든다. 반면, 기존의 연구실은 놀던 게 아니기 때문에 하던 일을 접고 뛰어들어야 하는데, 실패하면 연구비 전용 등으로 검사와 대화할 수 있어서 망설인다. 평소에 연구부정을 적발해 강하게 처벌하고, 대신 연구의 자율성을 높이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물리학 박사 출신 핀테크 스타트업 경영자 김인기 보나사피엔스 대표가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 대표는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신물질 LK-99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이번 이슈에서 치고 나가지 못하는 국내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 이 같은 글을 올렸다.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연구자와 아마추어까지 LK-99 연구에 도전하고 있지만 국내는 일부 초전도 연구그룹이 검증용으로 연구할 뿐 과학계의 움직임이 없다. 연구자들이 뭔가 하고 싶은 연구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거기에 연구비를 쓰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LK-99가 초전도체냐 아니냐, 연구자들이 해볼 만한 연구주제냐 아니냐를 떠나서, 어떤 참신한 연구주제가 부상해도 국내 과학기술계가 유연하게 뛰어들기 힘든 환경이란 점은 심각하다.

"정부 연구과제를 시작하면 연구목표부터 연구비를 어디에 어떻게 쓰고, 어떤 연구를 하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서를 내야 해요. 그 이후에는 그대로 해야지, 자칫 방향을 틀면 연구부정이나 연구비 전용 감사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죠."

국내 유명 대학의 공과대학 A교수는 국내 연구자들이 신물질 가능성을 보이는 'LK-99' 연구에 뛰어들지 못하는 원인을 '지나치게 융통성 없는 연구관리 제도'로 꼽았다.

창의성 발휘하기 힘든 기초연구 사업 구조

정부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들은 처음 제시한 계획대로 연구비를 쓰지 않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거나 계획에 없던 내용을 추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꼭 하고 싶은 연구주제가 있거나 급부상하는 연구 테마가 있어도 선뜻 발을 담그지 못한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처음 계획대로 하는 게 나중에 문제를 지적받을 소지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실행에 옮긴다면 연구 지원기관에 내용을 알리고 승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융통성 없는 제도는 연구자들의 호기심과 도전의식의 싹을 자르고 있다.

국내 주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B박사는 "기본적으로 신뢰가 부족하다 보니 온갖 엄격한 제도가 연구현장의 유연성을 막는다. 연구비만 해도 연구과제가 끝나면 회계사 등을 동원한 엄청난 정산과정을 거치는데, 연구비 규정이 까다롭다 보니 인정이 안 되는 항목은 대부분 연구자가 물어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연구가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비 배정이나 연구계획 변경도 규정상 가능은 하지만 승인과정을 거쳐야 한다. 경중에 따라 승인과정이 다른데 차라리 계획변경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

일단 만들고 실시간으로 결과 영상도 공개하는 해외 연구자들

LK-99는 전통적 개념의 초전도체가 아니더라도 전기저항이 0이거나 0에 가까운 신물질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전세계 연구자들이 직접 샘플을 만들어 검증하거나 이론적 연구를 하고 있다. R&D 선진국인 미국과 중국부터 인도, 대만, 유럽까지 각국에서 재현실험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성공적인 결과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LK-99 재현 실험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결과도 공개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LK-99 재현실험 연구 6개 중 4개가 화중과기대, 베이징 항공항천대, 동남대, 상하이대 등 중국 대학이다. 연구그룹별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반자성이나 전기저항 제로 특성을 확인했다고 보고도 있다. 특히 초전도체의 특성인 마이스너, 양자고정 현상을 관찰했다는 보고도 있다. 인도 국립물리연구소도 재현 실험을 했다. 미국에서는 아르곤국립연구소와 우주 스타트업 바르다스페이스가 재현 실험을 하고 있다. 중국 선양재료과학국가연구센터도 재현 실험을 진행 중이다.

해외의 한 SNS 활동가는 세계 각국에서 관찰되는 LK-99 관련 움직임에 대해 SNS에 '△중국:많은 대학 연구실이 가능한 한 빨리 복제하기 위해 노력 중 △미국:기업 마케팅에 활용 △러시아:고양이 소녀 등장, 그러나 모든 게 불분명 △유럽:휴가중'이란 글을 올렸다. 여기에 한국을 추가하면 '검증할 뿐 규명 연구는 손 놓은 과학계'란 표현이 어울릴 만하다.

LK-99 사례처럼 최근에는 국제 학술지 대신 논문 사전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연구논문을 공개하고 사후에 전세계 과학자들이 공개검증을 벌이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세계 과학자들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실력을 키운다. 국내 과학계는 엄격한 연구 규정으로 인해 이 생태계에 참여해 자유롭게 소통하고 국제협력을 펼치는 기회가 제한된 것이다.

핵심 연구자에 지원 몰아주는 중국 vs 개인에 자율성 주는 미국

중국이 속도와 결과물에서 미국보다도 앞선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원사'로 불리는 분야별 국가 대표급 과학자들을 평생 동안 전폭 지원해 이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연구그룹이 상시 가동되는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다. 중국 내 원사는 1000명 정도로, 차관급 대우를 받고 집과 자동차, 평생 연구비가 주어진다. 전용 병원도 따로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정부 연구비를 받아도 개인 기초연구의 경우 상당한 자율성이 주어진다. 연구과제를 신청할 때 연구목표를 제시하지만 정량적이고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고,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도 목적에 더 적합한 방법이 있다고 판단되면 변경할 수 있다. 개인연구의 경우 특별한 허가 절차도 필요 없다. 연구결과물에 대해서도 도덕성 문제만 없으면 시시콜콜 문제를 삼지 않는다.

계획서에서 벗어나면 꼬투리 잡힐까 걱정

이와 달리 우리나라는 실패하지 않는 연구, 연구자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누구나 성공하는 연구, 처음 계획한 대로만 가는 연구, 호기심과 도전을 포기하는 연구가 일상화돼 있다. 모두가 성공하는 데 획기적인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 것. 대학 교수나 공공 연구기관 연구자가 연구비를 당초 계획한 항목이 아닌 다른 데 썼다는 이유로 연구부정, 연구비 전용 이슈는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진다.

다른 대학의 C교수는 "풀뿌리 기초연구 사업에서도 연구자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연구를 하고 싶어도 옴싹달싹하기 힘들다"면서 "새로운 연구테마나 연구주제에 국내 연구자들이 보다 도전적으로 뛰어들 수 있으려면 국가적인 지원과 연구비 사용의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B박사는 "정부와 전문 기관들이 가두리 규정에 맞춰 엄격하게 관리하다 보니 과학기술자들이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 야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한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법을 잊어버린 과학기술계 현장의 분위기가 더 문제"라고 했다.

한 공공기관의 D박사는 "내년 정부 R&D 과제를 올해 상반기에 기획해 하반기에 예산을 정하는데, 실제 연구는 내년에 시작되니 그 과정에서만 1년의 '갭'이 있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미 기술흐름에서 1년 지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서 "일부 개인 기초연구는 개인이 자유롭게 연구주제를 정할 수 있도록 해서, 빠르게 치고 나가는 기술 분야에서 이들이 탄력성 있게 연구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카르텔 지적에 얼어붙은 과학계

일선 대학에 비해 자체 연구비 운용 재량권이 있는 정부출연연은 비교적 낫지만 이 역시 기관 차원의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사회적 관심이 큰 주제의 경우 정부 눈치도 봐야 한다.

정부출연연 기관장을 지낸 E박사는 "정부 연구비는 연구계획서대로 써야 하는 경직성이 있다. 다만 연구소는 자체 연구비가 일부 있으니 자율적으로 기관장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관의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최근 R&D 카르텔과 비생산적인 정부R&D 구조를 문제로 지적하고 R&D 관련 기관에 대한 감사를 이어가다 보니 연구현장의 분위기는 극도로 위축돼 있는 상황이다.

2005년 겪은 줄기세포 파문도 연구자들에게 강한 학습효과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안에 발을 담그는 순간 싸잡아서 'OOO집단', 'OOO카르텔'로 지목될 위험이 있다 보니 LK-99에 대해서도 아예 접근하지 않겠다는 과학계의 분위기가 강하다.

자연과학 전공 대학교수 F씨는 "2005년께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줄기세포 파문 이후 줄기세포 연구는 물론 국내 바이오 연구분야 전체가 추운 겨울을 맞았다. 당시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연구자들은 핫하게 떠오르는 연구분야에 몸을 잘 던지지 않는다. 과학기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들이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한국은 더이상 세계를 놀라게 하는 기술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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