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처럼 권력의 공연 압력을 받은 베토벤···“영주는 수천이지만 베토벤은 오직 한명뿐” [역사를 바꾼 사물들]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프랑스 군인들을 위해, 그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좀 해주시게.”
오스트리아 빈의 리히노프스키 대공은 베토벤에게 요청했다. 정중한 요청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명령‘이었다. 베토벤의 오랜 후원자로서 그 정도 지시는 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권력이 잼버리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폐영식 콘서트에 BTS(방탄소년단)를 불러 내려고 한 것처럼 젊은 베토벤 역시 권력의 압박을 받았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선택한 것이다.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대공의 영지를 떠나며 이런 편지를 남겼다.
“영주, 당신이 무엇인가요? 당신은 우연과 출생을 통해 존재하지요. 나는 나를 통해 존재합니다. 영주들은 그렇게 있고 앞으로 또 수천 명이 있겠지요. 하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한 명입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권력자에 대해 자신의 스승격인 요제프 하이든이나 한 세대 선배격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는 다른 태도를 베토벤이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음악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으로 깨어난 시민들이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부르주아 계급이 있었다. 이들이 음악의 새로운 소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와 궁정에 갇혀 있었던 음악을 가정과 카페와 공연장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새로운 악기, 피아노의 등장이 있었다.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피아노 등장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아노의 발명이 음악에 끼친 영향은 인쇄술의 발명이 시(詩)에 끼친 영향에 견줄만하다.”
또 서양 고전음악에서 세바스찬 바흐의 평균율을 ‘구약성서’라고 하고,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신약성서’에 견주기도 한다.
페르디난도 군주는 두 가지를 갖고 베니스에서 피렌체로 돌아온다. 하나는 미래의 피아노 발명가였고, 또 다른 하나는 끝내 그의 목숨을 앗아간 성병이었다.
페르디난도 군주는 피렌체궁정에 모아둔 자신의 악기 컬렉션을 관리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베니스 인근에 사는 재능있는 악기 기술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를 만나 그를 피렌체로 데리고 왔다.
크리스토포리는 피렌체궁정의 악기 관리와 조율을 하는 틈틈이 직접 악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원래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와 스피넷을 제작하려던 중 기존의 건반악기의 소리가 다소 둔탁해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방식의 건반악기를 만들기로 했다. 크리스토포리는 사이프러스(삼나무)와 회양목으로 건반과 본체를 만들었는데 이 악기를 ‘운 침발로 디 시프레소디 피아노 에 포르테(un cimbalo di cipresso di piano e forte)’라고 불렀다. ‘피아노(작게)와 포르테(크게)를 갖춘 삼나무 건반‘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몇 세기를 지나면서 피아노 포르테, 포르테 피아노를 거쳐 피아노로 정착됐다.
피아노는 여러차례 개량을 통해 소리의 질을 높여가면서 이 같은 편견을 극복했다. 소리가 나는 현을 제외한 현에서 나는 진동을 줄이는 뎀퍼(Demper), 해머가 반사적으로 돌아오게하는 건반과 해머 사이의 잭(Jack), 둔탁한 소리를 제어해주는 페달(pedals)이 개발되었다. 특히 1730년대부터 피아노를 제작했던 독일의 피아노 제작자 고트프리드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은 피아노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유명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주요 악기로 선택한 것이 대중화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첫 주자는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다.
하프시코드로 음악을 시작한 모차르트는 뒤늦게 피아노를 경험했다.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처음으로 만져본 것은 1774~75년, 그러니까 18~19세 무렵 뮌헨을 방문했을 때로 추측된다. 스물한 살 때인 1777년에는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간청해서 자신의 피아노를 갖게 됐다.
모차르트는 피아노의 매력과 능력을 간파하자마자 자신의 음악으로 그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예약제 연주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만드는데 피아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이 (피아노) 협주곡들은 아주 쉬운 것들과 아주 어려운 것들을 이어주는 즐거운 징검다리입니다. 지루함 없이 귀에 아주 선명하고 기분 좋게 들어와요. 전문가만을 만족시킬 악구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어요. 그렇지만 그 악구들을 분석할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들어도 왠지 모르게 그냥 아름답게 들리도록, 그렇게 썼어요.”
모차르트로 인해 피아노는 음악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당연히 베토벤의 작품에도 작품번호가 붙는데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번호와 베토벤의 작품번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은 그들의 작품세계를 연구한 음악학자에 의해서 작품 번호가 매겨졌지만 베토벤은 본인이 스스로 작품번호를 붙였다. 베토벤은 자기 작품에 스스로 작품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인 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저작권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피아노 보급의 영향이 컸다. 피아노의 보급은 음악의 소비행태를 바꿔놓았는데, 과거에는 단지 음악을 공연장에서 듣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시민계급의 교양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피아노 악보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음악가들이 안정적으로 저작료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물론 악보 출판은 그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익을 작곡자들이 누리지 못했다. 이는 하이든이 1769년 자신에게 작곡을 의뢰한 안톤 에스테르하지라는 귀족과 맺은 계약서를 보면 잘 나타나있다.
“하이든은 에스레르하지의 명령에 따라 필요한 곡을 작곡해야 하고, 그 신규 작곡한 곡을 남에게 알리거나, 복제해서도 안되며, 그 곡은 오로지 에스테르하지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이에 반해 베토벤은 곡의 저작권을 자신이 갖고 이것을 ‘원소스 멀티 유즈’ 방식으로 수익을 극대화했다. 작품을 정식으로 출판하기 전에 일정기간 동안에는 우선 귀족에게 비싼 값에 판매하고, 기간이 지나면 출판사에 넘겨서 판매에 따른 저작료를 받는 식이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적인 종교음악으로 꼽히는 <장엄미사 D장조>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루돌프 대공에게 돈을 받고 헌정했다가 이후 독일의 출판업자에게 3년 독점 사용권을 주어서 판매했다. 3년 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네 명의 출판업자에게 나누어서 재판매했다. 이런 전략 때문에 베토벤은 유럽에서 팔리는 악보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베토벤이 음악과 작품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10대 시절에 프랑스대혁명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사상의 영향으로 베토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인식했고 작곡가로서 자신은 예술가로 인식했다.
베토벤은 스무살 무렵부터 반바지 대신 긴바지를 입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반바지가 격식을 갖춘 귀족의 복장이었고, 긴 바지가 평민의 복장이었다. ‘긴 바지’를 불어로 ‘상퀼로트(sans-culotte)’라고 하는데 프랑스 혁명의 주도 세력이 긴 바지를 입은 평민들이어서 이들 공화파 혁명당원을 가리키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베토벤이 바로 상퀼로트였던 것이다.
앞서 리히노프스키 대공의 공연 요청를 거부한 배경에는 베토벤의 이런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측면도 있다.
물론 노년의 베토벤은 젊은 시절의 베토벤과는 달랐다. 1815년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유럽에서는 보수주의로의 회귀 움직임이 뚜렷했다. 그 중심에는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히니 정권이 있었다. 당연히 베토벤은 정권의 ‘블랙리스트’가 됐다.
1814년 베토벤은 유럽 정상이 모이는 빈회의를 위한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는 <영광의 순간>과 <연합 군주에게 바치는 합창> 두곡을 헌정했다. 프랑스혁명의 세례를 받았던 베토벤이 유럽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이전으로 돌려놓기 위한 정상 회의를 위해 곡을 쓰다니, 이 역시 역사의 진한 패러독스다.
연주를 마치고 공연장을 떠나는 리스트의 마차 뒤에는 귀부인들이 나눠탄 수십 대의 마차가 따라붙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리스트는 무대의 배치도 바꿔놓았다. 당시 피아니스트는 무대에서 관객을 등진 채 연주를 했다. 하지만 리스트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매력적인 옆모습과 격정적인 제스처,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피아노의 배치를 틀어서 관객들이 자신의 옆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말하자면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음악계 최초의 ‘아이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팬들이 자신의 어떤 모습에 환호하는지, 스타로서의 상품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간파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리스트의 친구인 시인 하이네는 리스트를 추앙하는 팬들을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고 부르기도 했다.
185cm가 넘는 훤칠한 키, 날렵한 콧날을 자랑하는 옆선, 금발의 머리카락 등 외모가 매력적이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의 가치는 그의 연주 테크닉에서 나왔다.
음악가로서 리스트의 롤모델은 작곡가나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였다. 1832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파가니니의 신들린 듯한 바이올린 연주를 본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현란한 테크닉을 피아노로 재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달성했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모든 테크닉을 구현해냈듯이 리스트는 피아노라는 악기로 할 수 있는 모든 표현들을 가능하게 했다. 리스트와 함께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던 클라라 슈만에게조차 리스트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연습하다가 결국 포기한 부분을 리스트는 초견으로 연주”하는 천재였다.
귀부인들의 열렬한 추앙을 받는 존재였던 리스트는 유명한 여성들과 숱한 애정 행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번은 자신의 훌륭한 경쟁자이자 좋은 친구였던 쇼팽의 아파트에서 피아노 제작자의 아내인 마리 플레옐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현장을 쇼팽에게 들키는 바람에 둘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1935년 리스트는 <예술가의 상황과 나의 사회적 지위>라는 논문을 통해 “작곡가와 음악인들은 장인이라는 낮은 지위에서 벗어나 전문직으로 인정받기 위해 합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지 주장에 그치지 않고 국제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합창과 음악 축제를 발전시키고, 음악 학교를 설립하고,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서 중요한 작곡가들의 악보를 싼값에 출판하도록 했다. 그는 “싼값에 배포하면 피아노가 있는 가정은 베토벤 등의 걸작들을 수집하여 집안에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리스트는 음악의 위상, 음악들 듣는 에티켓을 바꿔놓은 연주자이기도 했다. 1842년 러시아 초청 공연 때의 일이다. 니콜라스 차르가 공연장에 왔는데 차르는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을 뿐 아니라 리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옆 사람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리스트는 연주를 멈추고 차르를 바라봤다. 차르가 연주를 왜 멈추냐고 묻자 리스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니콜라스가 말하는 곳에서 음악은 침묵해야 마땅합니다.”
당연히 조롱이 섞인 대답으로 실제 메시지는 “음악이 연주되는 곳에서는 차르도 침묵해야 마땅합니다”였다.
1830년대 이전까지 콘서트장에서 청중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전까지 음악은 사교장이나 만찬장, 무도회의 반주곡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떠들었다. 1830년대부터 관중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해 연주 중에는 침묵하는 것이 유럽의 교양이 됐다. 그 중심에 리스트의 피아노가 있었다.
특히 1800년대 초기 영국의 로버트 워넘(Robert Wornum)이 부피를 줄인 업라이트(Upright) 피아노를 내놓으면서 집안에 쉽게 들여놓을 수 있는 악기가 됐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은 피아노 생산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18세기말까지 피아노 제작은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유럽 최대의 피아노 공장에서 한해에 생산할 수 있는 피아노는 고작 20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피아노 제작에도 공장형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1800년경 영국 최대의 피아노 제작사 브로드우드앤드선스는 연간 400대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1840년대에는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2500대로 늘었고, 영국내에서 2만 3000여대가 제작됐다.
이렇게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피아노의 가격은 급격하게 내려갔고 많은 가정으로 보급됐다. 피아노 가격이 1850년대에는 영국 교수의 12개월치 월급이었다가 50년후에는 3개월치 월급으로 내려갔다. 1945년 파랑스 파리에는 6만대가 넘는 피아노가 보급됐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만 10만명이 넘었다. 당시 파리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열명 중 한명은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예기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통상관념사전>에서 피아노를 ‘거실의 필수품’이라고 정의했다.
피아노 보급으로 중산층에도 ‘교양’이 중시되면서 바흐, 헨델, 베토벤, 모차르트 등과 같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부유층에서는 가정교사를 들여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여성에게는 피아노 학습이 중요한 교양으로 장려됐다. 안락한 실내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피아노 앞에 모여 있는 장면은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로망이 됐다.
한국에서 이런 질문은 마치 “너는 태권도 파란띠야? 검은띠야?”라고 묻는 것과 같다.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은 대부분 바이엘-뮐러-체르니로 이어지는 피아노 교육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 어린이들이 이런 순서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아니다. 유독 일본과 한국에서만 이런 단계별 학습이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처럼 피아노 학습의 ‘표준 코스’로 자리 잡았다.
경제·산업 분야에서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한국은 음악에서도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만든 피아노 교육 표준코스가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바이엘’은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엘(Ferdinand Beyer, 1803~1863)의 대표작으로, ‘피아노 연주의 예비교육’(Vorschuleim Klavierspiel op.101)이라는 106곡의 시리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것이 피아노 연주의 기본서처럼 자리 잡았지만 정작 유럽에서는 바이엘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일본의 음악학자 야스다 히로시가 지난 2002년에 바이엘의 흔적을 찾아 독일 현지를 취재하고 연구한 결과를 단행본으로 정리해 출간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바이엘만큼 유명하면서도 무명인 인물도 드물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체르니는 바이엘에 비해서는 유럽에서도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갖고 있다. 베토벤의 제자기도 했고 프란츠 리스트를 키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체르니의 교습법이 피아노 교육의 정석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체르니는 ‘100ㆍ30ㆍ40’ 같은 숫자로 분류된다. 체르니의 노하우가 들어있는 연습곡 100곡을 묶은 연습곡집을 떼고 그다음 30곡, 40곡으로 순서를 밟아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피아노 교육이 정형화된 것은 일본이 서양 음악을 족집게 과외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10년 후인 1879년, 일본은 서양음악 도입을 위한 연구기관인 음악취조괘를 설립하고 미국인 교사 메이슨(L.W.Mason, 1828~1896)을 초빙했다. 보스턴에서 초등음악교육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던 메이슨은 당시 미국과 유럽 각 지역에서 활용되고 있던 주요 음악 교재들을 활용해 음악 교육을 진행했는데 이 교재 중 하나가 1850년경 독일에서 출판된 바이엘의 연습곡집이었다. 바이엘의 교재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면서 바이엘은 음악 교육의 대명사가 되었다.
바이엘-체르니로 이어지는 표준화된 교육 방식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같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배출했으니 한국의 피아노 교육은 어떤 측면에서는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 또한 분명하다. 지겨운 반복의 과정을 견디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이내 피아노에 흥미를 잃어서 취미로도 즐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이내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는 가족 사진을 올려놓는 장식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는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 피아노 교육의 목적이어야 하고 교수법 역시 이에 맞는 방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야마하 도라쿠스는 1889년 하마마쓰에 ‘야마하풍금제작소’를 세웠고, 1897년 10월 자본금 10만엔으로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바로 자체적인 피아노 제작에 성공했고 세계 최대의 악기 기업으로 성장했다. 야마하는 악기 회사로 출발했지만 오토바이와 골프채 등 악기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런데 이런 분야도 사실은 악기 개발 과정에서 얻은 기술을 적용해 확장해 성공했다.
예를 들어 야마하 골프채의 성공엔 야마하의 강점인 소리 노하우가 있었다. 야마하의 골프 드라이버는 정교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악기를 만들 때 이용하는 반무향실(半無響室)에서 개발된다. 시제품 드라이버 헤드에 레이저를 쏘고 음향 측정 장비로 타구음을 분석한다. 악기를 테스트하는 팀이 골프채도 담당한다. 그래서 야마하의 드라이버는 타구감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의 피아노산업은 1956년 설립된 영창악기에서 시작됐다. 영창악기 창업자 김재섭씨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열아홉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 피아노제작사에서 일했다. 당시 큰형 재영씨는 일본에서 피아노상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작은 형 재창씨는 피아니스트여서 이들 삼형제에게 피아노는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김재섭씨는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1956년 서울 명동에 영창악기제조㈜를 설립했다. ‘영창’은 큰형과 작은형의 이름 끝 글자 하나씩을 따서 지었다.
1991년 한때 야마하를 제치고 세계 판매량 1위 피아노 제작사가 되기도 하지만 이후 경영이 어려워져 HDC그룹에 인수된다.
영창피아노의 화양연화는 아마도 빈소년합창단을 처음으로 상업광고의 모델로 쓰던 90년대 초반일듯하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그 CM송이 여전이 귓전을 맴돈다.
그런데 유명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은 남성이다. 손열음같은 여성 피아니스트들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 피아니스트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마치 과학적인 통계인 것처럼 인용하며 원래 남성이 여성보다 음악적으로 뛰어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피아노의 구조가 남성의 신체에 맞춰 표준화됐기 때문에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측면이 많다. 피아노의 구조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피아노 표준 건반의 길이는 122cm이고 한 옥타브의 길이는 18.8cm이다. 여성의 평균 뼘의 길이가 18~20cm이기 때문에 이 손크기로는 한 옥타브도 동시에 누르기 힘들다.
성인 피아니스트 473명의 뼘과 그들의 ‘명성 수준’을 비교한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12명의 뼘은 모두 22.4cm 이상이었다.
피아노 건반의 크기가 여성들에게 불리하다 보니 여자 피아니스트는 남자 피아니스트보다 손이나 손목의 통증이나 부상에 시달리는 비율이 50%가량 높다.
당연히 남자 중에서도 손이 작은 피아니스트는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중 한명이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도니슨(Chritopher Donison)이다. 손이 작은 편인 그는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도로 쇼팽의 ‘발라드 1번 사단조 Op. 23’의 코다를 거의 1000번쯤 연주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 손이 너무 작은 것이 아니라 표준 건반이 너무 큰 것을 아닐까?”
도스슨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표준 피아노 건반보다 크기를 8분의 7로 줄인 대안 피아노인 ‘도니슨 스타인뷸러 표준 피아노’를 직접 제작한 것이다. 크기를 줄인 피아노를 사용한 소감을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마침내 올바를 운지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분산화음을 손의 위치를 바꾸지 않은 채 한번에 연주할 수 있었다. (중략) 낭만파 음악에 그토록 자주 쓰이는. 넓게 쓸어 올리는 듯한 왼손 아르페지오 수사가 가능해졌고 똑같은 악절을 반복연습하는 대신 제대로 된 소리를 탐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피아노계는 완강하다. 새로운 표준을 받아들이거나 표준을 다양화할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피아노의 역사만 살펴봐도 사실 불변의 것은 없다. 피아노 자체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진 악기였고 그 이후 여러차례 기술적 변화를 거쳤다. 전자 시대가 열리면서 전자피아노도 피아노의 세계로 들어왔고 디지털도 수용했다. 고작 건반의 크기, 여성의 손, 아이의 손, 손이 작은 사람들의 손을 위한 새로운 표준을 수용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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