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반란’ 바그너그룹이 계속 건재한 까닭
(시사저널=김휘동 유럽 통신원)
최근 러시아 한 지역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현지 청년들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전직 바그너그룹 용병과 의무복무를 마친 예비역 군인 2명이 한 카페에서 전쟁에 반감을 품은 19~23세 청년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8월8일에는 전직 바그너그룹 용병 2명이 러시아 휴양지에서 돌팔매질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크림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러시아 남부의 크라스노다르에서는 휴양을 위해 방문한 이들이 이민자 배경을 가진 러시아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급습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러시아 시민들에 폭행당하는 바그너 용병들
바그너그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요리사로 알려진 예브게니 프리고진을 수장으로 한 민간 용병기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주요 전력이기도 했다. 한때 러시아 내 가장 강력한 권력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지난 6월 단 하루 만에 끝난 반란 시도 이후 입지가 크게 좁아들었다. 바그너그룹 전·현직 용병에 대한 폭행 등 비슷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현재 러시아 내에 바그너그룹에 대한 반감이 상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막상 반란 이후에도 바그너그룹은 건재하다는 시각이 많다. 지난 6월 반란 시도가 있고 며칠 후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주요 러시아 법인인 '콩코드'가 지난 한 해 정부 사업을 통해 800억 루블(약 1조2230억원)을 벌어들였다고 밝히며 자금에 대한 용처 조사를 시사했다.
푸틴이 바그너그룹을 정조준하지 않고 프리고진의 러시아 법인을 지목한 것은 바그너그룹의 독특한 특성과 연관이 있다. 러시아의 현행법은 민간 군사기업과 용병집단을 불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바그너그룹은 법률의 사각지대에서 운영돼 왔는데, 그룹의 법인 자체는 아르헨티나에 두고 있고 러시아 내 법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바그너그룹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으나, 사실상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전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반적인 러시아 법인은 누리지 못하는 러시아 연방군 인프라 활용 등의 특혜까지 누리고 있기에 미국 등은 바그너그룹을 러시아 정부를 대리하는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처럼 독특한 특성 탓에 그간 바그너그룹의 실권과 지휘체계 또한 푸틴 대통령이나 러시아 연방정부의 입김보다는 회색지대에서 수장 프리고진을 중심으로 그의 입맛대로 운영될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6월 반란 이후 이루어진 푸틴 대통령과 바그너그룹 지도부 간 면담에서 푸틴은 러시아군 예비역 대령 출신인 안드레이 트로셰프가 바그너그룹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휘권자가 되길 원한다고 밝혔지만, 프리고진은 이를 거부했다. 푸틴 대통령도 더 이상 같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과거 푸틴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압바스 갈리아모프는 이를 두고 "러시아 정부와 바그너그룹은 아직 서로가 필요한 관계"라며 "(반란 행위에도) 바그너그룹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푸틴의) 노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방증이 러시아 정부와 프리고진 소유 러시아 법인의 지속적인 사업 추진이다. 서방 정보 당국은 바그너그룹에 대한 러시아 연방정부의 지출이 콩코드 등과 같은 프리고진의 러시아 법인 등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정부는 바그너그룹의 반란에도 프리고진의 러시아 법인들과의 사업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는 러시아 입장에선 바그너그룹의 전략적 가치가 아직 유효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대금 납부적인 성격도 있다는 것이 유럽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지난 수년간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리비아, 수단, 모잠비크, 말리 등 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중심으로 용병 사업을 확장해 왔는데, 이는 해당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반(反)서방 진영 여론전의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을 받아왔다. 지난해 해당 지역에서 대테러 작전을 전개해 오던 프랑스군의 철수와 맞물리며 바그너 용병의 활동이 급격히 늘어난 바 있다. 프랑스 정부는 바그너그룹이 아프리카 현지의 반(反)프랑스 여론 촉진을 위한 가짜뉴스 및 정보 조작전에 가담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특히 과거 바그너그룹의 용병들은 프랑스 주둔지 부근에 신원불명의 시신들을 매장하며 프랑스군이 마치 잔악한 행위를 한 것처럼 조작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 국경 긴장감 고조시키는 바그너그룹
최근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내에서의 모병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벨라루스와 아프리카에서의 활동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바그너그룹은 벨라루스로 거점을 옮겨 벨라루스군의 훈련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다양한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바그너그룹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접한 벨라루스 국경지대에서 훈련을 실시하면서 이들 국가를 비롯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마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연합훈련을 실시한 것과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게 국경지대 현지 언론의 분위기다.
유럽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법적 회색지대를 악용하는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정부와는 별개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대상으로 독자적인 공격을 감행한다면 서방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며 "과거 크림반도 강제 합병 당시의 '녹색군복 군인들'처럼 러시아의 부인하에 이루어지는 군사작전을 바그너그룹이 추진할 경우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협조 없이는 바그너그룹을 완전히 제압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승인 없이 바그너그룹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 본토로의 간헐적인 공격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러시아의 군사적 승리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평이 나오는 가운데 최소한 러시아 내에서의 당위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승리를 위해 바그너그룹은 아직 푸틴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남아있다는 평가다.
바그너그룹 또한 푸틴의 조력 없이는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더는 누리지 못한다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둘은 결국 공생 관계다. 그러나 푸틴이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언제라도 바그너그룹을 내칠 수 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최근 바그너그룹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급격한 반감과 함께 바그너그룹 내에서도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직 용병들과 이들의 미망인에 대한 연금 지급에 차질이 생기고 있으며, 참전 군인 혜택 등을 위한 예비역 증명서 발급에 러시아 관계 당국이 원활히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이 전·현직 바그너 용병 커뮤니티 등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전문가는 "이들의 불만이 프리고진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된다면 바그너그룹이 와해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며 "결국 프리고진이나 바그너그룹의 미래는 푸틴 대통령이 이들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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