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화(慕華)사상의 뿌리 주자학(朱子學) 비판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회>
영국 경험론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판 철학 등 서양 근대 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엄격하고 철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반면 20세기 초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에서 급조된 ‘중국철학’은 전통적 사유 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기보다는 동양적 사유의 고유성을 다시 찾아 지키겠다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수세적 자의식(defensive self-consciousness)에서 시작되었다. ‘동양에도 서양 못지않은 위대한 철학이 있다’는 명제가 그 대전제였다. 그 결과 100년 넘게 축적된 중국철학의 연구는 중국적 사유의 독보성과 심오함을 미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오늘날 강단의 철학자들은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방대한 지적 전통에서 역사와 문학은 전면 배제한 채로 오직 과거 몇 명 학자들의 관념적 논의만을 쏙 빼내선 ‘철학’이란 명목 아래 맹목적으로 주해만 하고 있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역사의 선례를 탐구해서 새로운 사회·경제적 제도를 입안하고, 잘못된 정책과 그릇된 관행을 비판하고, 정부의 무능과 관리의 부패를 규탄했던 경세가(經世家)들이었는데, 현대의 ‘중국철학’은 그들을 수도승처럼 마음공부만 하며 우주의 섭리만 궁구하던 관념의 철인들로 왜곡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을 방불케 하는 협소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관념 유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렇게 협소하게 정의되고 편협하게 탐구되어 온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1960-70년대 대만에선 국민당 정권의 이른바 유교 파시즘(Confucian Fascism)과 공명했으며, 오늘날 중국에선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화해(和諧)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차차 밝히기로 한다.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악영향과 부작용도 이제 점검할 때가 되었다.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은 한국 사회에서도 중국 문명 자체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을 만들어냈으며,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비판 자체를 막는 낡은 이념의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철학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朱子學) 비판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한국은 지금도 지폐에 주자학자를 두 명이나 싣고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폐 속의 퇴계와 율곡
1975년 이래 대한민국 조폐공사는 1000원권, 5000원권 지폐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초상화를 실어 왔다. 언젠가 한국에 다녀온 한 미국인 과학자가 그 점이 참 인상적이더라며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화폐(philosophical currency)”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도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철학 사상을 설파했는가?”
외국인으로선 당연한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이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아니라면 지폐에 실릴 이유가 없다. 지폐에 실릴 정도라면 두 사람의 철학은 깊은 통찰과 독특한 사상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국과 달리 다른 나라의 지폐에는 철학자가 아니라 통상 정치 지도자나 근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실리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 지폐에도 철학자의 초상화가 실린 사례가 없지는 않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권 아래서 대륙 합리론의 선구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지폐 인물로 잠시 등장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1987년부터 2002년까지 25년 동안 지폐에 실었다. 전 세계 교양인들은 데카르트라 하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프로이트 하면 리비도(libido)와 초자아(superego)를 연상할 정도로 이 두 인물의 영향은 현재도 건재하다.
반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데카르트나 프로이트만큼 깊은 통찰과 독창적 사상을 담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을 이해하는가? 두 사람의 철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이황과 이이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한국 지폐의 특이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일본 지폐 1000엔에는 저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 5000엔엔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 1만엔에는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초상화가 실려있다.
세 사람 모두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여 개인적 성취를 이룬 근대적 지식인들이다. 일본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이다. 일본 사회 어디를 가도 박물관처럼 에도시대의 유적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그 두 역사의 영웅 대신 근대의 지식인들을 지폐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도(江戶) 시대 일본은 270여 번(蕃)으로 나뉘어져 있던 봉건(封建) 사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의 과정을 거쳐서 근대 국가로 재탄생했다. 오늘날 일본은 에도 시대가 아니라 메이지 시대의 연장이며, 현대 일본의 정신사는 메이지 시대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돌입했다.
새 나라의 지폐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새로운 인물들이 실린다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망해버린 왕조의 전근대적 인물들만 실려 있는 한국의 지폐가 특별해 보인다. 왜 한국의 지폐에는 16세기 조선의 철학자들이 실려 있는가? 이황과 이이가 그만큼 한국인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존경받고 있기 때문인가? 한국의 근대에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전혀 없기 때문인가? 아니라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을 부흥시켜 현대 한국인의 도덕성과 윤리 의식을 함양하려는 국가의 의도인가?
이황과 이이는 주자의 제자들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송원(宋元) 시대 중국에서 발흥한 주자학(朱子學) 혹은 성리학(性理學)의 본령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주희(朱熹, 1130~1200)라는 남송(南宋, 1127~1279)의 철인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 큰 스승으로 추앙하면서 오로지 주자(朱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설파하기 위하여 한평생 노력했던 16세기 조선의 주자학자(朱子學者)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주자의 제자임을 자부했고, 오늘날 동아시아 철학사를 정리하는 학자들도 대개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의 연장으로 정의한다.
주자학은 12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보편적 학문으로서 막강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사대부가 주자학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먼 옛날부터 인류는 인종, 지역, 나라에 상관없이 먼 곳에서 발원한 종교, 철학, 사상, 제도, 예술, 복식, 음식까지 무엇이건 유용하고 좋으면 주저 없이 가져다 썼다. 그러한 문화 교류와 상호 침투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사가 전개되었다. 이른바 중화 문명도 예외가 아니다. 일례로 당(唐, 618~907) 제국은 불교, 이슬람, 기독교, 배화교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다. 중세기 유럽 각 지역의 지식인들 역시 그 시대의 보편 철학을 수용하여 라틴어로 사유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본질적 문제는 퇴계와 율곡이 주자학을 통해서 얼마나 심오하고, 독창적이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 사상을 만들었냐이다. 주자학을 수용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인간의 심성(心性)과 우주의 질서에 관한 나름의 독특하고 심오한 철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두 사람의 철학이 조선 고유의 참신하고 독특한 철학이 아니라 주자학의 연장이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두 사람의 문집 어디를 읽어봐도 주자학적 기본 전제의 타당성 여부를 캐묻고 따지는 비판적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16세기 조선에 태어나서 주자학을 배우며 자랐고, 주자학의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 철학 논쟁을 벌였고, 주자학의 확산과 보급에 힘썼던 주자의 제자들일 뿐이었다.
퇴계는 주희의 이기설(理氣說)을 탐구하면서 이(理)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이발설(理發說)을 제창했다. 율곡은 주희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발전시켜 이통기국설(理統器局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정도 언명만으로는 21세기 한국의 지폐에 초상화를 실을 만큼 대단한 철학적 성취라고 할 수가 없다. 기껏 이(理)와 기(氣)라는 주자학의 개념 틀에 갇혀서 주희의 이론을 정교하게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16세기 중세 철인들의 지적 탐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대 데카르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악한 악령이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전개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합리적 사유는 퇴계나 율곡의 주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전제와 가설을 회의하고 검증하는 데카르트적 회의에 빚을 지고 있다 하면 과언일까.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계 철학계의 그 누구도 퇴계와 율곡에 그 정도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주자학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사유 체계
주자학은 개개인의 비판적 사유가 아니라 전통적 사유의 답습을 강요하는 닫힌 이념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은 고대(古代)로부터 성인(聖人), 곧 성스러운 인물들을 통해서 전승되는 도의 계보, 곧 도통(道統)을 전제하고 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까지 이어지다가 천년 넘게 단절된 도의 계보를 성리학의 선구인 북송오자(北宋五子, 북송대 다섯 스승)가 다시 찾아냈고,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남송의 주희가 마침내 세상에 도를 알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주자 이후로는 중국 사상사에서 학파의 분기는 계속 일어났지만, 도통의 담론은 전개되지 않았다. 주자의 권위가 그만큼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논어(論語)’ 구절이 암시하듯, 전근대 유가(儒家) 경학사(經學史)에선 비판하고, 도전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일개인의 지적 모험심은 억압된다. 성인의 말씀에 이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 개인의 독창적 사유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답습하고, 주석하고, 설파하면 그 정도에서 학인의 지적 의무는 완수되기 때문이다. 전통을 넘어서는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은 사특한 망념으로 여겨졌다. 그 점에서 퇴계나 율곡은 물론, 그들을 떠받든 후대 조선의 유학자들 거의 모두가 자발적으로 주자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던 주자의 제자들이었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주자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주자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 퇴계와 율곡의 학문도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전국 시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이미 “책을 다 믿느니 차라리 책이 없는 게 낫다(盡信書不如無書)”며 ‘서경(書經)’의 절대 권위를 부정했다. 비판적 독서만이 지적 계발에 도움을 준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언명이다. 혈연적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퇴계와 율곡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오히려 맹자의 비판 정신에 따라 그들이 숭상했던 주자학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할 때다. 철학으로서 주자학은 과연 어떤 한계를 보이는가? ‘슬픈 중국’에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주자학 비판으로 시작하려 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리 속에는 여전히 주자학적 사유 방식이 남아서 합리적 사유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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