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너무 컸나…핵개발 딜레마 파고든 '오펜하이머' [시네마 프리뷰]
(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오는 15일 개봉하는 '오펜하이머'는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기대감을 준 작품이다. '메멘토'와 '다크 나이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등 작품성과 흥행까지 다잡은 수작을 선보였던 그가 실존 인물을 스크린에 담아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롭고 흥미로웠고 기대가 컸다. 언론시사회에서 공개된 그의 신작은 일부 극찬을 받고 있지만, 대중성 면에서는 다소 의문을 남겼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의 본질이 반드시 스펙터클로 귀결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딜레마 과잉과 상업영화 흥행에서 중요한 재미라는 측면을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지난 10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국내서 처음 베일을 벗은 '오펜하이머'는 장장 18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삶을 펼쳐냈다. 영화의 흐름은 오펜하이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진행됐던 비밀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이전과 이후의 삶, 핵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 자신의 뜻과 달리 원자폭탄이 인류의 비극이 되자 미국 핵 정책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로 구성됐다. 오펜하이머 중심 서사는 컬러로, 오펜하이머와 극명히 대립한 미국 원자력위원회 창립 위원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 중심 서사는 흑백으로 표현해 시점을 달리한 구성도 선보였다.
3시간 분량의 전기영화인 줄 알면서도 관람했지만, 예상보다 더 밀도 높은 스토리가 강점이자 단점으로 보였다. 타 감독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급진적인 영화적 체험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놀란 감독이지만, 이번 신작에서 스펙터클은 CG 없이 완성한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 정도다. 사실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추구한 만큼, 테스트 장면에서 볼거리가 크게 돋보이지 않았고, 핵 개발 과정도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아이맥스 관람에서의 장점은 고요함 속에 폭발적인 위력을 보여주는 트리니티 테스트신과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압도적인 열연에서 비롯된 몰입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들은 시공간의 혼재에 대한 감독의 비전으로 영화에 대한 이해가 다소 어려워도, 스크린에서의 체험적 가치만큼은 만족도를 충족했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오펜하이머'가 선보인 스펙터클은 시각적 만족도를 충족시키는 장면들이 아닌,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인간적 내면을 풀어낸 스펙터클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주도한 핵개발이 불러온 파멸의 연쇄 반응으로 "나는 이제 죽음이요, 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며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이를 연기로 구현한 킬리언 머피는 인물 그 자체가 된 듯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잔상이 남을 만큼의 인상적인 열연과 굉장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눈빛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이후를 기점으로 오펜하이머의 괴로운 내면과 번민, 트라우마, 미국의 정치적 상황의 충돌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낸다. 오펜하이머는 군비 경쟁을 우려해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끌어내고 개발 대신 규제를 권고하는가 하면, 수소 폭탄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이에 미국은 오펜하이머를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오펜하이머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자신의 순수했던 의도를 청문회에서 입증해야 하는 불행에 이른다. 이는 극 초반 오프닝에서 활용했던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쳤다"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받았던 형벌을 오펜하이머의 상황과 일치시킨 장면들로, 인간에 핵 무기를 안긴 과학자의 비극을 풀어낸 통찰력도 돋보인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전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그 의도와 달리 인간이 이를 어떻게 악용하고 위협을 가하는지, 또 이로 인해 한 과학자가 어떤 비극과 윤리적 딜레마를 겪는지에 대해 집약적으로 그린 전기 영화라 할 수 있다. 후반부는 루이스 스트로스의 장면과 청문회 내용이 주를 이루고, 오펜하이머가 느끼는 딜레마는 입체적이지만 긴 시간에 걸쳐 끝날 듯 끝나지 않으며 다소 반복적이면서 지루하게 다뤄져 피로감을 안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들에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했던 관객들이라면 3시간에 걸쳐 담긴 많은 대사와 과학 용어들과 등장인물들이 큰 장벽과 부담이 아닐 수 있지만, 대중적인 재미를 따진다면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인셉션' '인터스텔라'와는 다른 작품이라는 점에서 국내에선 어떤 평가를 끌어낼지 예측이 더욱 어려워졌다. 오는 15일 개봉.
aluemcha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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