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은 다른 유명한 과학자들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펜하이머는 20세기 과학계는 물론 역사에도 발자국을 남긴 물리학자로 기억된다. 오펜하이머의 굴곡진 삶을 둘러본다.
오펜하이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그를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원자폭탄 같은 최첨단 무기를 혼자서 개발했을 리가 없다. 원자폭탄은 당시로서는 역대급 규모의 인력과 자금이 투입된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1942년의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수천 명의 과학자,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의 로스앨러모스, 테네시주 오크리지를 비롯한 약 서른 군데의 시설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1급 비밀로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일만큼의 정보만 제공하는 ‘구획화’ 정책을 채택했다. 프로젝트의 전모는 ‘과학 총책임자’를 맡은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극소수만 알 수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는 과학 이론과 기술 분야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의 역할은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취합해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시급한 사항에 지시를 내리고 그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기는 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가 시작할 당시 38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교수였던 오펜하이머가 이런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물리학 연구자가 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독일 괴팅겐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그가 유럽에서 공부할 당시 물리학계에서는 이른바 ‘고전물리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격변의 현장에서 뛰어난 논문을 써 영국과 독일 등 세계 과학의 중심지에서 인정을 받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최첨단 물리학 이론을 가르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자들 중 하나가 됐다.
그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수많은 대학원생을 이끌며 미국 물리학계의 학파를 형성했고 자신의 매력적인 성품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에 이미 카리스마 넘치는 과학계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당시 미국에서 원자폭탄 연구를 하던 연구소 책임자들에게 과학 총책임자 직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 추천받은 이가 오펜하이머였고 그는 이전에 관리 업무를 담당한 적이 없었음에도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훗날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를 임명한 것이 자신이 내린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패권 경쟁을 하는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경쟁에서 소련은 독자적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미국이 이미 개발한 원자폭탄 연구를 훔쳐오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우선 미국의 핵무기 관련 정보를 빼내기 위한 소련측 스파이는 분명히 있었다.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로젠버그 부부 간첩사건’이 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아내 에셀이 군인 신분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에셀의 남동생을 통해 기밀 정보를 얻어 소련측에 전달한 혐의로 1950년 체포된 사건이었다.
그 외에도 독일계 영국인 이론물리학자인 클라우스 푹스의 사례도 있었다. 푹스는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 사업인 튜브-앨로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는데 이때 얻은 정보를 소련 민간정보부(NKGB)에 넘겨줬다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다. 이런 방식으로 소련이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소련은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이후 불과 4년만인 1949년에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오펜하이머의 스파이 혐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그가 미국의 핵 기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며 더욱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오펜하이머는 기본적으로 핵 기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기 위한 다국적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소폭탄 개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는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반공주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의심을 받기에 좋았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도 트집잡기 좋은 행적이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적도, 핵 기밀을 소련측에 넘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19번의 비밀회의를 걸쳐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 접근 승인을 철회했다. 이는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끝낸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60년 뒤인 2014년 미국 오바마 정부는 당시 청문회에서 작성됐던 수백 쪽의 문서를 공개하며 오펜하이머의 ‘누명’을 벗겼다. 또 2022년 12월 15일, 미국 에너지부가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을 공식 취소하며 오펜하이머의 스파이 혐의가 완전히 벗겨졌다.
● 의혹 3. 오펜하이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오펜하이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과학을 전공했지만(하버드대에서는 화학, 유럽에서는 물리학) 평생에 걸쳐 문학과 예술, 종교 등 다방면에 지적인 관심을 유지했다.
그는 인도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암송할 정도로 읽었는데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핵실험 직후 내뱉었다는 말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는 그 중 한 구절이기도 하다. 요즘 표현으로 오펜하이머는 다방면에 전문성을 가진 융합형 인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뼛속까지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외부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내재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일에 대해 당시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갖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로서 한 일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미국이 핵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규제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상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보안 청문회장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렸을 때 그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펜하이머는 1949년 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서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도 시인했다. 그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적이 있었음을 숨기려 하지 않고 그 당시 자신의 사고방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이는 1953년 미국 원자력위원회 보안 청문회 자리에서 그의 충성심을 의심받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인가 취소로 귀결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논리적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대단히 순진한 물리학자이자,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었으며, 정치적인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과 상식에 바탕을 두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과학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저자소개
최형섭 과학기술사 연구자로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과학기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과기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펜하이머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번역했으며 저서로는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8월호, [과학사 극장]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이창욱 기자 hchoi@seoultech.ac.kr,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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