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한없이 또렷한 오월의 기억…화가로 변신한 ‘영원한 시민군’ 김상집
정확하게 마지막 결사항전이 언제 진행이 됐는가, 그것을 그림으로 남겨야 되겠다 해서 그린 거예요. |
노동운동을 했던 김상집 씨는 1980년 5월 18일부터 녹두서점에서 운동권 조직원들 사이 연락책을 맡았습니다. 이후 상황일지를 작성해 故윤상원 열사(최후항쟁 지도부 대변인)에게 넘겼습니다. '투사회보'의 1차 자료를 만든 겁니다. 당시 녹두서점은 지역 운동권의 본부 역할을 했는데, 서점을 연 사람이 김상집의 큰 형 김상윤입니다.
집단 발포 이후인 22일부터는 전남대학교에서 학교 버스를 가져와 직접 몰고 다녔고, 앰프를 설치해 궐기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향토예비군의 참여를 호소하는 성명을 궐기대회에서 낭독했고, 예비군을 동원해 직접 전남도청으로 집결시켰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김상집 씨가 모두 맡았던 일입니다.
■화가로 변신한 '영원한 시민군' 김상집
윤상원과 정상용·이양현 등 최후항쟁 지도부와 함께 호흡하며 '결사항전'을 결의했던 김상집 씨.
1985년 뒤늦게 전남대 수의대에 입학한 김 씨는 졸업 뒤 20년 가까이 동물병원을 운영했습니다.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와 참여자치21 등 시민단체 대표를 지낸 시민운동가입니다. 5·18 최후항쟁 지도부 대변인이던 故윤상원 열사의 평전을 쓰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그러다 환갑이 된 나이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5·18 시민군·수의사·시민운동가에서 화가로...어떤 사연일까요? 김상집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녹두서점과 김상집
5·18 전후 당시 운동권 본부 역할을 한 곳 가운데 하나가 녹두서점입니다. 녹두서점을 연 사람은 김상윤, 김상집 씨의 형입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주시하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상윤 씨는 계엄 확대 전후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시위가 일어나기 전 체포됐습니다.
동생 김상집 씨는 이때부터 녹두서점에서 연락책을 맡았습니다. 김상윤이 예비검속으로 잡혀간 뒤 故윤상원 열사가 직접 부탁한 일입니다.
상원이 형이 새벽에 연락을 받고 저한테 "녹두서점을 좀 지켜달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연락이 오기로 돼 있어서. 큰 형이 예비검속 되어버리고 상원이 형도 예비검속 될 수 있잖아요. 상원이 형은 국민연합 사무국장이어서 서점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나보고 '서점에서 연락해라' 그렇게 한 거죠. |
당시 녹두서점을 거점으로 '투사회보'와 궐기대회에 쓸 현수막이 만들어졌습니다.
김상집 씨는 5월 18일부터 녹두서점에서 상황일지 작성을 도맡았습니다. 서점으로 모이는 제보와 정보들을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나간 겁니다. 서점에서 상황일지를 적어 故윤상원 열사에게 넘겼고, 박용준 등이 투사회보를 제작했습니다.
녹두서점에서 상황일지를 적었어요, 나 혼자 적은 게 아니고 형수님하고. 서점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제보들이 많이 들어와요. 어디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그걸 이제 노트에다가 계속 적어 나가죠. 제가 받으면 제가 적고, 형수님이 받으면 형수님이 적고, 상황일지를 요약해서 그걸 상원이 형한테 전달해 주는 거죠. 상원이 형이 갖고 가서 그걸로 투사회보를 찍어내고... |
■시민군이 된 김상집
5월 21일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김상집 씨도 동참했습니다. 김 씨는 당시 광주 외곽인 지원동 쪽에서 무기를 싣고 시내로 들어오는 트럭을 여러 대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공 비행하던 헬기도 눈에 띄었습니다. 자신이 군 복무했던 부대의 헬기였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농성동에서도 무기를 내려놓고 백운동이랑 광주공원에서도 곳곳에다 트럭으로 싣고 온 무기들을 다 내렸다고 그래요. 제가 본 것은 전남대병원 앞이에요. 저도 이제 총을 집고 탄창을 호주머니에 넣었죠. 남광주역 쪽에 서 있는데 헬기가 굉장히 저공 비행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있던 부대의 헬기에요. 506 항공대에 있었는데, 공중에서 정지 상태를 유지해요. 헬기가 정지 상태에 있다는 얘기는 발포한다는 거예요. 사격할 때 딱 정지해서 쏘거든요. |
집단 발포 이후 흩어졌던 주요 인사들이 5월 24일 전후로 다시 합류했습니다. 정상용·이양현 등입니다. 24일 도청 앞 궐기대회 이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YWCA로 모였고, 녹두서점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이들과 극단 '광대' 구성원들이 많이 포함됐다고 합니다.
■최후항전을 준비하다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가 총기를 회수하며 당국과의 협상에 주력하던 때 김상집을 포함한 이른바 '녹두서점' 구성원들은 최후항전을 준비했습니다. 당국이 민주화 일정과 수습 대책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물러설 수 없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용과 윤상원 등은 기존 '수습대책위원회'를 주도적으로 개편해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꿨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입니다.
그날(5월 25일) 김종배 씨를 수습대책위원장으로 앉힌 거죠. 녹두서점팀과 YWCA팀이 대거 수습위원으로 들어갔죠. 부위원장에 정상용이 들어가고, 기획실장 자리를 만들어서 영철이 형·이양현·윤강옥, 대변인을 윤상원이 하고, 민원실장(정해직)도 들어가고, 이렇게 보강을 한 거예요. |
김상집 씨는 대학생과 예비군을 동원하고 무장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5월 25일에는 대학생들을 주로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으로 합류시켰고, 이후 향토예비군을 동원하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실제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시민군으로 많이 참여했다고 말합니다.
5월 26일은 제가 차량으로 방송하고 돌아다닐 때 예비군 동원을 계속 얘기를 했어요. 향토 예비군은 광주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26일 3시, 마지막 제5차 궐기대회죠. 이때 예비군이 많이 온 거예요. 그리고 제가 예비군 동원에 대한 성명서도 낭독했죠. |
■결사항전 '민주시민투쟁위원회'
김상집이 그린 〈결사항전〉은 최후항쟁 지도부의 회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탁자에 앉은 사람들이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위원들이라고 합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강옥·허규정·박남선·이양현·김준봉이고, 가운데 회의 주재자처럼 보이는 인물이 정상용입니다. 그 옆으로 김영철·윤상원·구성주·김종배·정해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상집 씨는 회의가 끝나고 들어가서 목격한 기억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계엄군의 진압이 완료된 이후까지도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존 '수습대책위원회'가 다시 구성되고 나서 마지막 항쟁 지도부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계엄군에 진압돼 체포된 후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존재는 숨기고 기존 수습대책위원회만 있었다고 주장했고, 그 덕에 살아남은 주동자 가운데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압 후)계엄군이 505 보안대에서 두드려 패면서 최소 10명에서 15명은 사형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숨겼단 말이에요. 그때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이런 것을 쓸 수가 없었죠. |
■그림으로 되살린 또렷한 5·18
김 씨는 지난 6년 동안 5·18 항쟁의 주요 장면을 기록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2년 전부터 도청 앞 궐기대회 모습을 기록한 대형 그림(가로 2.6미터) '궐기대회'을 그려왔고, 최근에야 완성했습니다.
"누가 현장을 지켰으며 누가 그 자리를 피했는지, 누가 안타깝게 죽었으며 누가 또 간신히 살았는지, 누가 소리쳤으며, 누가 입을 닫고 저들의 군화를 싹싹 닦아 주었는지..."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 여는 글 가운데 - 임의진(작가/메이홀 관장, 윤상원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김 씨는 당시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6년간의 결실은 최근 광주시 동구 메이홀에서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궐기대회와 결사항전·최후의 항전 등 오월항쟁 기록화들을 선보였습니다.
사람들이 5·18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새벽에 폼으로 총만 잡고 있다가 그냥 항복한 걸로 생각한다 이 말이에요. 공수부대 군인들이 막 무자비하게 쏴서 몇 사람 죽은 걸로. 그런데 실질적으로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실제 전투가 있었다, 그 전투 가운데 윤상원이 죽었다, 이걸 명확하게 알리고 싶었던 거죠. 궐기대회도 마찬가지고요. 유인물을 뿌린 것이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래서 결사항전을 외친 게 궐기대회란 말이에요. 우리는 민주 일정이 나올 때까지 하여튼 싸우자고 했고, 그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거죠. 그런 것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입니다. |
광주일고를 졸업한 김 씨는 고등학생 때인 1974년에 이미 박정희 정권 유신 반대 시위를 학내에서 주도했다고 합니다. 시위 주동자였기에 정학을 당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 1980년 5·18을 맞았고, 주저 없이 시민군이 됐습니다.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재정국장을 맡으며 6월 항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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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용 기자 (hara1848@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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