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그저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다’... 스무돌 맞은 1865 셀렉티드 빈야드 시라

유진우 기자 2023. 8.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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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짧은 기간에 연달아 우승한 스포츠 팀을 일컬어 ‘왕조(王朝·dynasty)’라 부른다. 첫 우승은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성공을 쟁취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후 연패(連霸)를 위해선 손에 쥔 것들을 지키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매년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수천개 브랜드가 쏟아진다. 이 가운데 ‘누구나 아는 와인’으로 자리잡기란 쉽지 않다. 몇몇 와인이 한때 국민와인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오래 지킨 와인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이 급변하는 소비자 취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내 다른 와인에 그 칭호를 빼앗겼다.

칠레 산 페드로사(社) 와인 브랜드 1865는 이 혼란 속에서 묵묵히 20년 동안 국민와인 자리를 지켰다. 1865는 한국 와인 시장의 산 증인이다. 2003년 1865가 국내 첫 선을 보일 당시, 우리나라 와인시장은 척박했다. 아주 저렴하거나, 반대로 아주 비싼 와인만이 시장을 장악했다. 소비자는 와인 가격은 물론 포도 품종, 심지어 생산 국가에도 무지했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때 쑥대 밭이 됐거든...
포도밭이라고 남아 났겠어?

그런데 칠레에는 오리지널이 남아있단 말이지.
잘 모르는 사람이나 ‘프랑스 와인, 프랑스 와인’ 하는 거죠.”

범죄의 재구성, 2004

지금에야 칠레산 와인이 국내 시장을 장악했지만, 당시 칠레 와인 인지도는 바닥에 가까웠다.

칠레 산 페드로와 1865 독점 공급 계약을 맺은 종합주류기업 금양인터내셔날은 브랜딩부터 다시 시작했다. 보통 와인은 생산지나 생산자, 제조사에서 이름을 딴다.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는 별 다른 상표가 필요없다. 지역명과 생산자명이 곧 그 와인 이름이다. 미국도 비슷하다. 제조사 이름 그 자체가 와인 제품명으로 불린다.

정석대로 라면 1865에도 숫자 대신 산 페드로 와이너리 로고에 고풍스런 포도밭 스케치와 포도 품종, 그 포도를 키운 포도밭 이름이 들어가야 했다.

산 페드로와 금양인터내셔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으레 붙였던 하얀 겉표면 스티커 대신 산 페드로 와이너리 창립연도 1865를 은빛으로 큼지막하게 넣었다. 까만 병 위로 빛나는 네자리 숫자는 곧 호기심을 자아냈다.

‘18홀을 65타에 칠 수 있게 해주는 와인’, ‘18세부터 65세까지 누구나 즐겨 마시는 와인’ 같은 창의적인 해석이 따라왔다. ‘와인은 몰라도 1865는 안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자 골프장들은 서둘러 1865를 구비하기 바빴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끼리 설과 추석 명절 선물로 1865를 주고 받는 문화도 생겼다. ‘국민와인’ 지위는 자연히 따라왔다.

세계적인 와인 리서치 기관 와인인텔리전스(Wine Intelligence)는 지난해 펴낸 한국 와인 시장 보고서(South Korea Landscape)에서 1865를 한국 와인시장 브랜드 인지도 1위, 브랜드 구매 빈도 1위, 소비자 브랜드 친밀도 1위 와인으로 꼽았다. 브랜드 인지도 부문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래픽=정서희

으레 다른 ‘국민’ 수식어가 붙은 제품이 그렇듯, 많이 팔리려면 단지 가격 대비 만족도만 높아선 부족하다. 가격표를 뗀 제품 그 자체 품질이 확연하게 좋아야 한다. 1865는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셀렉티드 빈야드 시라와 소비뇽 블랑 두 와인이 각각 신대륙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절대적인 품질을 입증했다.

1865는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스스로를 시험하고 있다. 상당수 와이너리들이 기존 와인 맛과 향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쏟는 가운데, 1865는 이전보다 나은 맛과 향을 끄집어 내기 위해 꾸준히 양조 방식을 개선했다.

2021년 산 페드로는 31살이었던 여성 양조가 안드레아 칼데론을 수석 와인 메이커로 임명했다. 칠레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산 페드로만한 와인 대기업이 30대 초반 나이로 수석 와인 메이커 자리에 오르는 경우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칼데론은 새로운 방식으로 포도를 키우고, 양조 방식을 바꿔가면서 1865를 우리나라 소비자 입맛에 가장 잘 맞는 브랜드로 만들고 있다.

그가 올해 20주년을 기념해 만든 ‘1865 20주년 리미티드 셀렉션’은 1865가 가진 최고급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를 모두 섞어 만들었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 메를로, 말벡,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까지 한 병에 모두 담은 보기 드문 블렌딩(여러 포도품종을 섞는 기법)이다.

신식 양조 기법 뿐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는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곧 선보일 ‘1865 타유 피노누아’는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族)이 직접 와인 양조 과정에 참여했다.

‘마푸체’는 원주민어로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와인은 기존 칠레 와인 주요 산지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가야 나오는 말레코 지역에서 빚는다.

원주민들은 이 새로운 와인 산지가 어떤 성질의 토양이고, 어떻게 와인을 만들어야 땅이 가진 개성을 와인에 불어넣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 시도는 ‘와이너리와 원주민 지역사회가 펼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모범적인 프로젝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1865 전 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105만병이 팔렸다. 1865 브랜드 기준 연간 최대 판매량이다. 1865 셀렉티드 빈야드 시라는 명실상부한 1865 브랜드 간판 상품이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레드 와인 신대륙 3만원이상 6만원 미만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금양인터내셔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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