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일왕 유죄 내린 '그 법정'[젠더살롱]
“이 법정에 제출된 증거의 검토에 근거하여 판사는 일왕 히로히토를 인도에 관한 죄에 대해 형사책임이 있다고 인정한다···.”
2000년 12월 8일에서 12일까지 열렸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마지막 날, 가브리엘 맥도널드 재판장이 ‘일왕 히로히토’의 유죄를 선언하자 도쿄 청년회관은 함성과 눈물로 뒤덮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렸던 ‘극동국제군사법정’에서 면책되었던 일왕의 책임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법정은 ‘일왕 히로히토’가 “‘위안소’ 제도의 확대를 통해 강간과 성노예제를 영속시키고 은폐하는 방대한 노력을 고의적으로 승인하거나 부주의하게 허가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결론은 그로부터 1년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 결정되었다. 1991년 김학순의 ‘위안부’ 최초 증언이 안긴 충격 이후 꼭 10년 후의 일이었다.
김학순의 최초 증언에서 2000년 여성국제법정까지
1991년 8월 14일 텔레비전을 통해 본 김학순의 얼굴과 눈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이후 몇 번이고 본 장면이지만, 처음 봤을 때 충격이 하도 묘해서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받은 충격을 표현하자면 ‘아, 살아 계셨구나!’였다. 그전에도 독립기념관에 있었던 흑백의 무참한 사진들을 통해서, 미장원에서 굴러다니던 잡지와 길거리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힐끔거리면서, ‘그런 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전쟁터에 끌려가 육체와 성이 ‘짓밟힌’ 여자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도 했고,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 태어난 여자들의 운명이라고도 했다. 그런 ‘가르침’을 들을 때면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얼굴과 이름을 밝힌 전 ‘위안부’의 출현이라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지만 어디서고 볼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의 김학순이 준 충격은 ‘그런 여자들’이 일제강점기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서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그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학순의 최초 증언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충격은 연달아 등장한 여러 아시아 국가와 네덜란드 피해자로 증폭되었다. 이에 더해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1992-1994)에서의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이 알려지면서 전시 성폭력(wartime sexual violence)이 국제 사회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전시 성폭력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계획된, 적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한 공격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전시 성폭력이 적에 대한 공격일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의 성이 남성과 남성이 중심인 민족 및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도 역시 같은 비극이 벌어지면서 국제 사회는 두 사태에 대한 국제형사법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당시까지의 국제법에서 다루지 않았던 전시 성폭력에 대한 판결, 법규정, 이론들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이처럼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등장과 탈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만나 열릴 수 있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어떤 법정이었나
1946년 5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다양한 피해자들의 피해보다는 승전국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법정이었다. 당시는 유럽 제국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가 미국과 구 소련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적국이었던 일본을 동맹국으로 만들어야 했던 미국은 ‘일왕 히로히토’를 면책하고 상당수의 전범들을 석방하여 그들을 통해 친미국가 일본을 수립하려고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런 미국이 주도한 극동국제군사법정이 일왕의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 그리고 성폭력에 대한 처벌을 적극적으로 제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군주국가였으며 식민 지배의 역사를 가진 영국도 이에 적극 동조했다. 이는 극동국제군사법정에 앞서 열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자국민인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나치 독일의 죄를 묻기 위해 ‘인도에 반하는 죄(crime against humanity)’를 신설했던 것과는 판이한 태도였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극동국제군사법정이 제외한 이 세 가지 쟁점 즉 일왕의 책임, 식민지 지배 책임 그리고 성폭력에 대한 처벌을 다뤘다.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한 여성국제법정은 범죄가 있었던 그 시기의 법에 의거해 제국 일본의 죄와 책임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그리하여 제국 일본군의 강간과 성노예제 운영에 대한 ‘일왕 히로히토’의 책임과 유죄, 일본정부의 ‘위안소’제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한 국가책임이 인정되었다.
이처럼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글로벌 시민들의 연대의 힘으로 열린 민중법정이자 피해자 여성들이 제국 일본의 최고 권력을 피고의 자리에 소환한 여성법정이었다. 남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다양한 피해사실이 드러난 아시아의 법정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이 북한과 함께 꾸린 남북 공동 기소단은 남북 모두의 피해자를 대변했는데 이는 식민 지배, 냉전체제, 한반도 분단의 역사와 피해자들의 삶이 어떻게 씨줄과 날줄로 얽혀 왔는지를 드러내는 역사적 현장이었다.
일본의 여성운동과 시민들의 헌신은 이 법정이 일본의 중심부인 도쿄에서 열릴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일왕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일본 사회에서 일왕과 일본국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 열려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기한 이들이 일본의 여성운동가들이었다. 특히 아사히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아시아 여성문제에 대해 수많은 기사를 작성하고 한일 관계 및 한국 여성운동도 잘 알고 있었던 고(故) 마츠이 야요리가 1998년 유엔 인권위원회 개최 포럼에서 여성법정 개최의 뜻을 밝힌 것이 법정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21세기 벽두에 열린 여성국제법정은 비록 법적 강제력은 없었지만 성폭력을 피해자의 수치에서 가해자의 책임으로 전환시키고, 성폭력과 국가 책임에 대한 국제 법리가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의 세계
한국은 가장 많은 ‘위안부’ 피해자가 있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도 큰 편이다. 그럼에도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중, 고교 시절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배우고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관련 ‘굿즈’를 산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도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경우가 허다하다. ‘위안부’ 피해자가 한국뿐 아니라 전 아시아와 네덜란드에도 있었다는 사실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연대의 경험에 대해서도 대부분 무지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여성의 관점에서 보기보다 한일 간 역사, 외교 문제로 보는 데 익숙한 탓이다.
한편 일본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백래시가 극심해졌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다만 몇 줄이라도 실려 있었던 중·고교 교과서의 ‘위안부’ 기술이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빠지고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해 평화헌법 개헌론자들이 득세하게 된 것도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다.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그나마 있었던 진전마저 모두 부인하며 망각과 왜곡의 정치를 구사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 정부의 행태다.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주전장'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일본 사회의 일부가 전전의 제국 일본에 대한 어떤 헛된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준 수작이다.
올해 광복절에는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정신을 되새기며 '주전장'을 시청하는 것은 어떨까. 여기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최종판결문 일부를 적어둔다. “이 민중법정은 한국, 일본, 필리핀의 대표를 장으로 하는 국제실행위원회에 의하여 생겼다... 그녀들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이며 ‘생존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에 올 세대를 위해서’이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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