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 잘 쌓은 강원, 1만명 사전 대피한 경북… 피해 줄였다
10일 한반도를 강타한 6호 태풍 ‘카눈’이 11일 오전 평양 남동쪽에서 열대저압부로 약화하면서 소멸했다. ‘카눈’은 1951년 관측 이래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관통한 첫 태풍으로, 이동 속도까지 느려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우려만큼 심각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기준 전국의 제방 유실과 주택 침수 등 시설 피해는 379건으로 집계됐다. 농작물 피해 면적은 여의도의 4배에 달했다. 하지만 공식 인명 피해는 아직 없다고 중대본은 밝혔다. 기상청의 정확한 예보와 정부·지자체의 사전 대비가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카눈 피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1만5000명 이상을 사전 대피시키고 지하도로 등 2400여 개 위험 지역을 미리 통제하는 등 선제적 조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했다.
‘카눈’의 피해는 ‘위험 반경(태풍 오른쪽)’에 놓인 영남권과 강원도에 집중됐다. 특히 태풍이 몰고온 고온 다습한 동풍(東風)이 태백산맥에 부딪혀 형성한 강한 비구름대가 강원 영동에 폭우를 쏟아냈다. 9~10일 강원 영동엔 400㎜ 이상의 비가 퍼부었고, 속초·고성엔 시간당 91.3㎜, 87.5㎜의 극한 호우를 기록했다.
이번에 강릉 등 동해안 6개 시·군의 주택 침수 피해는 이날 오후 5시 기준 194건이었다. 반면 강원도는 2002년 태풍 ‘루사’ 때 주택 300여 채가 물에 잠기고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무너지고 유실된 하천과 제방, 도로 등도 9330여 곳이나 됐다. 이듬해 태풍 ‘매미’가 닥치면서 도로와 교량, 수리 시설 등 1708곳이 피해를 입었다. 이후 강원도는 수년 동안 제방 쌓기, 준설 공사, 하천 복구 등 3500여 곳에 대해 수해 복구 사업을 벌였다. 당시 태풍 피해를 교훈 삼아 대비를 본격화한 것이 ‘카눈’ 피해를 줄인 바탕이 된 것으로 강원도는 분석하고 있다. 또 태풍 북상 시점이 동해안 만조(滿潮) 시간과 겹치지 않은 것도 동해안 태풍 피해를 줄인 요인으로 꼽힌다.
영남권은 한 달 전 장마 때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경북의 경우 지난달 ‘게릴라성 폭우’로 산사태가 나면서 25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이번엔 태풍이 닥치기 전 주민 9804명을 마을회관·경로당 등 791곳으로 대피시켰다. 전국 대피 인원 1만5883명 중 61.7%에 달한다. 예천군 관계자는 “지난달 집중호우 피해를 입은 벌방리, 백석리 등에 공무원들이 직접 찾아가 복구 현장 등을 사전 점검했다”고 말했다.
카눈이 북상하면서 점차 힘이 빠진 것도 피해를 줄인 요인이다. 서울 등 수도권에선 ‘카눈’이 30㎞ 안팎까지 접근했는데도 큰 피해가 없었다. 상륙 후 ‘카눈’의 힘이 빠진 것은 우리나라 지형이 평지보다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태풍에 산은 일종의 ‘벽’이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힘을 소진한 것이다.
기상청이 태풍 경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맞힌 것도 사전 대비에 큰 역할을 했다. 각국 기상 당국이 예측한 경로 중 우리 기상청 분석이 가장 정확했다. ‘카눈’ 상륙 사흘 전 한반도를 관통할 것이라고 예보했다. 발 빠르게 움직인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기업들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야외 작업 중단과 낙하물 등 위험 요소 제거 조치를 선제적으로 진행한 데다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이 태풍이 근접할 때와 겹치지 않게 했다”고 말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작년 ‘힌남노’ 때 침수돼 가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올해는 태풍을 대비해 정문에서 3문까지 1.9㎞ 구간에 차수벽을 설치하고 배수로를 늘렸다. 개학한 학교도 절반 가까이 원격 수업 등으로 학사 일정을 조정했다. 정부 관계자는 “대비하면 태풍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다”며 “역설적으로 과거 태풍 피해의 상당 부분이 인재(人災)였던 셈”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