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금반지 정신, 잼버리를 끝으로 작별하고 싶다
나라 위한 희생이 왜 미담인가
국민이 나서서 창피함 수습하는
한국적 해법, 그만둘 때 됐다
초등학생 시절인 1980년대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500원인가 낸 기억이 있다. 북한의 한국 수몰(水沒) 위협에 맞서려 성금을 모은다는 가정통신문이 뿌려졌다. 그렇게 661억원을 걷었다 한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쌀 모으기도 종종 했다. 이런 행사는 ‘고사리 손으로…’ 비슷한 문구와 함께 미담처럼 언론에 소개됐다. 되돌아보면 안보와 복지라는 국가의 헌법상 의무를 국민이 땜빵한 셈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국가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일에 너그럽다. 나라가 못살고 힘없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남아서인지 국가의 ‘구멍’을 별일 아니라고 여기고 거리낌 없이 돕는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때 부도 난 나라를 구하겠다며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후엔 바다에 퍼진 기름을 어쩌지 못해 정부가 난감해하자 자원봉사자 123만명이 몰려가 기름을 걷어냈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어떤가. 초기 국경 통제 실패, 백신 확보 지연 등 정부의 부실 대응을 전 국민 마스크 착용과 자영업자 희생으로 막았다.
많은 이들은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여긴다. 하지만 국민의 이런 희생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을 본떠 1990년대 말 처지가 비슷한 태국·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났다는 기록은 없다. 2010년 미국 멕시코만(灣)에서 석유 시추선 폭발로 기름 유출 사태가 났을 때 사고 수습은 자원봉사자가 아닌 정부가 주도했다. 코로나 방역에 대해선 미국·유럽에서 폭동 가까운 반발이 일었다. 질서 잘 지킨다는 일본에서조차 식당 영업 제한에도 많은 술집이 밤늦게까지 붐볐다고 한다. 이 나라들이 이상하다기보단 한국 국민이 특이하게 착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오늘 막 내린 전 세계 스카우트 행사 ‘새만금 잼버리’가 정부의 부실한 준비 및 대응으로 재앙이 될 위기에 몰리자 국민이 또 힘을 보태 수습했다. 중앙·지방정부의 합작 방만으로 21세기 행사라곤 믿기 어려운 총체적 부실 사태가 발생해 해결사로 시민과 민간 기업이 나섰다. 155국이 참가한 행사가 망가지면 망신이란 생각에 대학 기숙사, 기업 연수원, 종교 시설을 즉각 내줬고 도로가 마비되는 불편도 감내했다. 전국 각지선 온갖 이벤트가 일사불란하게 조직됐다. 한 치킨 회사 사장은 ‘아이들 먹여야 한다’며 트럭을 몰고 숙소인 대학을 찾아 통닭을 풀었다. 가수들은 급조한 콘서트를 위해 다른 일정을 희생하고 무대에 섰다.
영국 BBC는 한국 시민의 언행을 특이하다는 듯 보도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대원들에게 다가와 사과하고 ‘(한국에) 머물러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가게는 물건을 깎아주고 빵집에선 케이크를 공짜로 주고 있다.” 소셜미디어엔 ‘잼버리 대원을 시내에서 보고 사과했다’란 글이 적잖이 올라온다. 한국인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일부 전문가는 정신에 뿌리 깊이 박힌 ‘수치 문화(shame culture)’를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수치를 꺼리는 동양적 유교 문화가 국가의 창피만은 막자는 집단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정말 부끄러운 나라였던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맞지 않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산업·문화·기술 등의 역량을 보면 한국은 이미 ‘창피하지 않은 나라’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 여당 의원은 잼버리 사태에 대해 “금반지 정신이면 못 해낼 게 없다”고 했다. ‘관군(官軍)이 무력해 의병이 나섰다’는 임진왜란 때 소리인가. 잼버리 사태는 자기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게으른 공무원들이 초래한 어이없는 국가 실패의 사례일 뿐, 국민이 힘 모아 나라 체면을 살린 뭉클한 미담이 아니다. 원인과 책임을 끝까지 밝혀야 하는 이유다. ‘금반지 정신’과 작별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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