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은 관동 연안에 근접해서 상륙할 수도 있다고 예보됐더랬다. 비와 바람이 맹렬했다. 문어 모양 미끄럼틀 아래 터널에 있어도 그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태풍 카눈이 지나가던 밤,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소설 ‘태풍이 지나가고’(민음사)를 읽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소설로 다시 썼다고 하네요. 주인공 료타는 한때 촉망받는 소설가였지만 현재는 흥신소에서 일합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복권을 긁으며 ‘한탕’을 꿈꿔보지만 어림없지요. 태풍이 몰아친 9월 어느 날, 료타는 우연히 전처와 아들, 어머니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소설의 주제 의식은 전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걸 신경 쓰는 료타에게 흥신소 소장이 하는 말에 녹아 있습니다. “이제 가족이랑 만나는 건 그만둬.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다 큰 남자라는 거다.”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해 방황하는 료타에게 어머니는 조언합니다. “행복이라는 건 말이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거야.”
태풍이 지나간 아침, 부러진 나뭇가지며 망가진 우산과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렸지만, 녹색 잔디는 비와 바람에 씻겨 싱그러워집니다. 태풍이 세상의 표정을 바꿔 놓은 것처럼, 료타의 마음도 변화합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전처가 결혼하면 아들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저항하는 것은 그만두자. 그렇지만 내가 준 복권을 아들이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복권은 도박”이라는 전처에게 료타는 정색하며 말했거든요. “도박이 아니야. 꿈이지. 삼백 엔으로 꿈을 사는 거야.” 상처를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태풍은 없지만 ‘희망’이 그 상처를 치유하리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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