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5. 발해(渤海), 동해를 내해(內海)로 삼다

최동열 2023. 8. 12.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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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어선들이 동해바다 파고를 헤치며 고기잡이에 나서고 있다.

■ 발해, 일본 교류 공식 사절만 34차례 기록
-한번에 10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 도해(渡海)하기도

예전에 TV에서 ‘대조영’ 이라는 대하 역사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망국(亡國) 고구려의 유민으로 태어난 대조영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를 갈망하는 같은 처지 고구려 유민들 및 말갈인들을 규합해 나가면서 새 나라를 여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시청률이 꽤나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의 인물 소재였던 대조영이 세운 나라가 ‘발해(渤海)’라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발해는 우리가 배운 그대로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가 멸망한 뒤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뒤를 이어 탄생한 나라였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주로 중국 과의 관계나 다툼 등이 학습의 중심 소재가 되면서 동해를 무대로 한 발해인들의 해양 개척은 거의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사실 발해는 동해를 내해(內海)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해상 운용 능력을 갖춘 나라였다.

중앙아시아 및 고대 해양사 연구의 권위자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그의 저서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2000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사서를 인용, “발해가 무왕 때인 727년 일본에 첫 번째 사신을 보낸 이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공식 사절만 무려 34차례였다”고 밝혔다.

일본과의 교류는 발해 뿐 아니라 고구려 시대부터 줄곧 이어져 온 전통이다. 윤재운 대구대 교수가 연구 발표한 논문 ‘역사 속의 동해, 미래의 동해(2008년)’에 따르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고구려 사절의 대왜(對倭) 파견은 서기 570년 평원왕 이후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118년 동안 25회에 달했다. 고구려는 동해를 통한 일본과의 통교를 적극 추진한 나라였고, 그 전통은 발해 대에 이르러 더욱 확대 계승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라장군 이사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동해상 한가운데 울릉도를 거점으로 하는 우산국 정벌에 나선 것도 고구려와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장악, 북진하는 신라의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윤명철 교수는 앞에 소개한 책에서 발해 상인들을 장사 수완이 뛰어난 모험가로 묘사하면서 “상인들을 태운 민간배들도 종종 독자적으로 출항, 서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인(鐵利人·말갈인) 1100명이 일본에 간 적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적으로 무동력 범선에 의존해야 하는 먼 옛날 동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려 1000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동해를 건넜다는 것은 발해의 선박 제조나 항해 능력이 그만큼 뒷받침 됐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바다를 건너 홋카이도 등을 경유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방법도 있고, 교역을 위해 그런 항로가 활용되기도 했겠지만, 당시 홋카이도와 일본 북부는 하이인(蝦夷人·에조, 아이누족의 전신) 원주민들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득세하는 세상이었기에 일본 조정과 직접 교섭을 위해 혼슈의 중남부로 직행하기 위해서는 동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엄청난 위험이 수반되는 모험의 여정을 감수해야 했다.

▲ 동해바다 한가운데 울릉도 밤바다를 밝히는 오징어 배 어화(漁火). 강원도민일보DB

■발해인은 항해술 뛰어난 모험가
-동해 건너면서 인명 피해도 많아
-훗날 동여진족들의 항해술도 발해 때 축적

지난 1997년 12월, 발해 건국 1300주년(1998년)을 맞아 뗏목을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는 ‘발해 항로탐사’에 나섰던 탐사대원 4명이 일본 인근 해역에서 폭풍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한 것을 비롯해 2005년에 러시아 포시에트 항을 출발했던 2차 뗏목 항해 원정단도 악천후로 표류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점을 돌이켜보면, 그 옛날 발해인들이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동해 항해에 나섰는지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발해인들은 동해를 건너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727년 무왕 때 발해가 첫번째로 파견한 사신단 24명도 풍랑에 휩쓸려 일본 해안에 표착하고, 표착지에서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하이인 원주민들의 습격까지 더해 많은 희생자를 낸 뒤 8명 만이 일본 나라(奈良)에 도착,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고려(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속일본기))”고 그 존재를 인식시킨 것으로 전한다.

국제신문의 예전 취재보도를 보면, 발해인들의 모험적 여정을 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국제신문은 지난 2006년 12월 기획시리즈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④발해의 대외교류와 멸망’에서 중국 연변대 방학봉 교수의 저서 ‘발해 사절단이 일본으로 왕래한 항로’를 인용, 777년에는 120명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46명만이 생존했고, 815년에는 일본으로 갔던 사절이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 중 사망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발해인들이 일본 항해 중에 숱한 고초를 겪은 것은 그들의 항해 시기가 주로 겨울철에 집중됐던 것과 무관치 않다. 즉, 기상 통계상 매년 10월-2월까지는 일본 쪽으로 북서계절풍이 불게 되는데, 무동력 범선들은 이 계절풍을 이용해야 일본으로 쉽게 갈 수 있기에 동해상의 파도가 거세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로 겨울 항해를 강행했던 것이다. 우리는 앞서 동여진족들이 1019년, 11세기 초에 동해상을 주름잡으면서 대마도와 일본 후쿠오카 해안 지역까지 들이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일본인들부터 ‘도이(刀伊)の입구(入寇)’라고 불리는 큰 변란이 있었다는 것을 살펴봤는데, 동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들 동 여진족들의 해상 운용 능력도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 동해를 경영하면서 축적된 해상운용능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렇듯 1300여년 전에 이미 동해를 무대로 화려한 해상 교류 역사를 꽃피웠던 발해가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통일신라와 당(唐), 흑수말갈 등이 경합하던 당시 동북아 국제정세에서 견제와 균형의 추를 맞추는 한편 많은 물자와 문물을 전해주고, 부족한 물자를 보충한 것은 교역의 상식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발해가 전해준 문물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윤재운 대구대 교수는 지난 2008년 11월 강원도민일보가 주최하고 국토해양부가 후원한 ‘역사속의 동해, 미래의 동해’ 심포지엄에서 일본사서 기록을 근거로 당시 발해로부터 일본에 전래된 ‘모피’ 일화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내용인 즉, “919년 발해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발해 사절단의 대표가 가죽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했는데, 일본의 왕자가 검은 담비 가죽 옷 8벌을 겹쳐 입고 참석, 사절단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철이었는데 일본 왕자가 담비 가죽옷 8벌을 껴 입고 위세를 과시했다는 것은 북방의 강자인 발해가 동해 바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일본에 전해준 모피 옷이 당시 일본의 유력자들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일본 측의 사료 하나를 덧붙이면, 일본 설화집 ‘고단쇼(江談抄)’에는 919년 일본측 접견 관리인 미야코노 아리나카가 발해 사신 배구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詩) 구절이 전해지는데, “당신과의 재회를 정확히 기약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는 마음에 두고 북쪽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네” 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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