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월급 모아 체코 체스대회 참석”… 돈-시간 쏟아도 행복
본보 기자 ‘체스 대회’ 출전
게임과 놀이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어른들이 있다. 지난달 체코 국제대회에 다녀온 ‘체스 덕후’ 기자, 창고에 미니카 트랙을 만들고 밤마다 조립과 주행에 몰두하는 사업가 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기자는 어학연수로 열두 살 때 뉴질랜드에 갔다가 홈스테이 가정에서 우연히 접한 체스에 매료됐다.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즐길 수 있는 두뇌게임이란 점이 매력적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연스레 꿈이 생겼다. 바로 해외 체스 대회에 참가해 전 세계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는 것이었다.
넉 달 동안 월급을 모으고 휴가를 낸 끝에 기자도 전 세계 48개국에서 1066명이 참가한 체스 대회 ‘체코 투어’에 출사표를 던질 수 있었다. 오랜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지난달 19일 출국을 앞두고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회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열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파르두비체라는 작은 도시에서 지난달 22일 개막했다. 파르두비체 시의원회관 대강당에는 1, 2층을 합쳐 300개 넘는 체스판이 설치됐다. 2층 난간에는 참가자들의 국기가 빼곡하게 걸렸다. 기자를 포함해 한국 참가자도 60여 명 있었던 만큼 태극기도 걸려 있었다. 대회장 한쪽에 입점한 기념품점에선 체스 서적과 티셔츠 등을 팔았다. 참가자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기는 이날 오후 3시 시작됐다. 아비터라고 불리는 심판이 “행운을 빕니다. 경기를 시작해주세요”라고 안내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악수를 나눴다. 기자의 첫 상대는 한국에서 온 박주혁 군(14)이었다. 어린 학생이라고 보고 방심한 탓일까. 박 군의 매서운 공격에 중요한 국면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됐다.
박 군의 충고를 듣고 마음을 다잡은 기자는 체코 선수 2명과 독일, 폴란드 선수를 차례로 이기고 4연승을 달렸다. 하지만 승점이 같은 선수끼리 만나 겨루게 되는 대회 방식(스위스 리그 방식) 때문에 상대 실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연승 행진을 계속 이어갈 순 없었고, 결국 6승 1무 2패로 입상에는 실패한 채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최저 점수 제한이 없는 ‘오픈 레이팅’ 그룹 참가자 238명 중 18등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또 기자는 이 대회를 통해 세계체스연맹(FIDE)이 부여하는 공식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 FIDE 점수가 있는 300여 명 중 57위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대회 출전을 위해 술자리를 줄이고 외식도 참으며 마련한 돈으로 항공권과 숙박비를 충당했다. 불규칙한 업무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 연습을 했다. 준비하는 동안 ‘이렇게 어렵게 출전했는데 공식 점수도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공식 점수를 받으려면 공식 점수 보유자와 대결해 일정 경기 이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경기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세계인들과 원없이 체스를 두며 쌓은 평생의 추억이었다. 자연스럽게 귀국한 후 다음 메이저 대회가 언제 열리는지 알아보게 됐다. 찾아보니 내년 1월에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었다. 항공권과 숙박비를 합치면 이번에는 얼마를 모아야 할까. 다시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 국적 달라도 체스판 앞에선 ‘한마음’
성별과 나이, 국적이 모두 제각각인 참가자들이었지만 체스를 향한 애정은 한결같았다. 네덜란드에서 개발자로 일하는 알베르트 판 위르크 씨(30)는 2년 전 넷플릭스 체스 드라마 ‘퀸스 갬빗’을 보고 체스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판 위르크 씨는 “배낭여행을 다닐 땐 늘 혼자였지만 체스를 두러 올 때면 항상 새로운 인연이 생겨 설렌다”고 했다. 이날 경기에선 기자에게 패배했지만, 판 위르크 씨와는 귀국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됐다.
대회 마지막날인 30일 시상식에선 우승 선수의 국가 대신 연맹가가 울려퍼졌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선수들의 출전이 금지됐는데, 러시아인 아나톨리 모스크빈 씨(21)가 FIDE 소속으로 출전해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빈 씨는 “러시아인 출전이 금지됐지만 체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참가했다. 체스는 내가 꿈꾸는 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차분한 성격과 집중력을 갖게 해줬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한국 돈으로 약 20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한국인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는 ‘체스 1세대’로 불리는 이철우 씨(52)였다. 열 살 때 영화에서 주인공이 턱시도를 입고 크루즈에서 체스를 두는 장면을 본 후 체스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40년 넘게 체스를 둔 그는 “승패를 떠나 나이를 먹고도 계속 체스를 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면서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경기에 계속 출전할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유희왕, 미니카, 큐브… 멈추지 못하는 즐거움
부산에서 농업 관련 사업을 하는 김홍규 씨(48)의 창고에는 트랙 길이만 10m가 넘는 타미야 미니카 정식 경기용 트랙이 설치돼 있다. 매일 밤 김 씨는 이곳에서 미니카를 개조하고, 주행 연습을 한다.
미니카지만 트랙에 올라가면 최대 시속 160km로 질주한다. 물론 속도가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트랙에서 튕겨 나가지 않도록 안정성도 갖춰야 한다. 이 때문에 요즘 미니카에는 공기 흐름을 제어해 차체를 눌러주는 ‘윙’과 충격을 흡수하는 ‘서스펜션’도 탑재돼 있다.
5년 전 김 씨는 우연히 어릴 적 갖고 놀던 미니카에 빠져들었다. 매일 3, 4시간씩 꾸준히 노력한 결과 지난달 태국에서 열린 ‘미니카 아시아챌린지’ 출전 자격을 얻으며 버킷리스트를 이뤘다. 김 씨는 “입상은 못했지만 많은 걸 배웠다”며 “올해 말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챌린지에 참가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노력 중”이라고 했다.
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일규 한국외국어대 수학과 교수(36)의 가방엔 전공책 대신 다양한 종류의 큐브가 가득했다. 큐브를 섞은 뒤 천천히 맞춰 달라고 부탁하자 몇 번 돌리지 않고 손쉽게 큐브 퍼즐을 완성시켰다. 그의 최고 공인기록은 10.79초라고 했다.
최 교수는 “학창시절 공부가 하기 싫어 집에 돌아다니는 큐브를 맞추다가 큐브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며 “처음에는 열흘이 넘게 걸렸는데 공식을 연구하며 시간을 단축한 끝에 대회에 출전할 실력을 갖추게 됐다”고 돌이켰다.
그는 내친김에 대학에서 대회를 직접 개최하며 전미큐브대회 운영위원과 세계큐브협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분기마다 대회를 열며 큐브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1위 기록을 8번 갈아치웠다. 최 교수는 12일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큐브대회 월드챔피언십’에서도 조직위원장을 맡아 경기 운영을 총괄한다. 최 교수는 “내가 사랑하는 취미를 누군가 진심으로 즐기는 모습을 볼 때 무엇보다 행복하다”고 했다.
파르두비체=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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