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예측해 발빠른 대비…400㎜ 물폭탄에도 인명피해 ‘0’
태풍 ‘카눈’ 피해 왜 적었나
기상청은 이날 오전 6시 기준 전국에 내려진 모든 태풍 특보를 해제했다. 하지만 1951년 기상 관측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한 태풍인 카눈은 전국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기준 전국에서 1만5883명(1만1717가구)이 대피했고, 도로 등 공공시설 196건과 사유시설 183건 등이 침수 피해를 보았다. 농작물 피해 규모는 여의도 면적의 4배 수준인 1157.9㏊에 달했다. 중대본은 태풍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다만 전날 대구 군위군에선 60대 남성이 하천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대구 달성군에선 전동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던 한 남성이 소하천에서 실종됐다. 중대본은 이들을 태풍 피해가 아닌 안전사고로 분류했다.
태풍 카눈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례적이었다. 지난달 28일 괌 서쪽 730㎞ 해상에서 태풍으로 발달한 뒤 14일 만에 소멸했다. 일반적으로 태풍의 수명은 닷새 정도다.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며 두 차례 갈지자 모양의 급격한 방향 전환을 거쳐 한국·일본·대만 3개국에 피해를 줬다. 지난 10일 오전 9시20분 경남 거제에 상륙해 16시간에 걸쳐 북상한 것도 독특하다. 기상청 관계자는 “한반도 주변 바다의 해수면 온도가 예년보다 1도 정도 높은 28~29도에 달해 지속적으로 태풍에 에너지를 공급했고, 한반도가 서쪽의 티베트고기압과 동쪽의 북태평양고기압 사이의 골짜기가 통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해수면 온도가 높으면 바다에서 태풍으로 더 많은 열과 수증기가 전달된다.
카눈은 한반도 상륙 후 일반적인 태풍의 절반 수준인 평균 시속 20㎞로 천천히 움직이며 많은 비를 뿌렸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특성 때문에 동해에서 끌어온 수증기가 태백산맥에 부딪히면서 강원 영동과 영남 지역에 폭우가 쏟아졌다. 지난 9일 이후 누적 강수량은 강원 고성 402.8㎜, 경남 양산 350㎜, 경북 경주 318.0㎜, 울산 305㎜(11일 오전 5시 기준)를 기록했다. 강원 속초에는 10일 하루에만 368.7㎜ 비가 내렸다. 이는 속초 일강수량 역대 최고치이자 태풍의 영향으로 기록된 일강수량 중 10위다. 역대 최대는 2002년 8월31일 루사가 강릉에 뿌린 870㎜다.
진로를 조기에 예측해 상대적으로 대비할 시간이 많았다는 점도 피해를 줄이는 데 일조했다. 중국을 향해 북서진하던 카눈은 지난 4일 방향을 완전히 꺾어 일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상청은 지난 5일 일본 가고시마를 향하던 카눈이 다시 방향을 틀어 한반도에 상륙한다는 예보를 처음 발표했다. 지난 7일부터는 한반도 중심을 관통한다는 예보를 내놓기 시작했다. 상륙 이틀 전인 지난 8일까지도 영국은 서해, 미 해군은 동해를 따라 북진할 것으로 예측했다. 문일주 제주대 태풍센터 교수는 “기상청이 막판에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카눈처럼 이상 경로를 취하는 태풍들은 오차가 상당히 커서 맞추기가 어려운데 결과적으로 한국이 제일 정확했다”고 평가했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은 “전세계 수치예보 모델을 계속 지켜봤는데, 기상청이 뚝심 있게 예보를 잘했다”고 말했다.
예보에 따라 중앙 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위험 지역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는 등 발빠르게 움직인 덕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이상민 중대본 본부장(행정안전부 장관)으로부터 태풍 피해 상황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위기 속에서도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건 1만5000명 이상의 주민을 위험 지역에서 사전 대피시키고, 지하도로 등 2400여 개소의 위험 지역을 미리 통제하는 등 선제적 조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평가했다.
평년보다 두 배 정도 많이 내린 장마 때문에 수해 방지 대책이 상대적으로 잘 갖춰진 것도 피해를 줄이는데 도움이 됐다. 지난달 26일까지 이어진 올해 장마 기간 전국 평균 강수량은 648.7㎜로 집계됐다. 이는 1973년 이후 51년간 장마철 강수량 중 3번째로 많은 것이다. 평년 장마철 강수량은 356.7㎜다. 장마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도시 지역의 우수관, 농촌의 제방 등을 청소하고 보강하는 작업이 이어졌고, 산업체들도 차수벽 설치, 배수로 정비 등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보름 만에 태풍이 몰고 온 폭우를 큰 피해 없이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운채·정은혜·정혜정 기자 na.un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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