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LF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신규 브랜드 ‘캠브리지’를 론칭했다. 8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적 가치와 철학을 모티브로 ‘뉴노멀(New Normal)’ 유니섹스 캐주얼을 선보인다는 컨셉트다. 브랜드 관계자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세상에 활력을 주는 ‘탐구하는 삶’을 브랜드 핵심가치로 제안하며 관련 심볼과 아이콘을 시각화한 디자인 의류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했다.
최근 1~2년 사이 위즈코퍼레이션은 예일대학교와, 옴니아트는 코넬대학교와, 동광인터내셔날은 UCLA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캐주얼 패션 비지니스를 시작했다.
MLB·빌보드·팬암 등도 패션 론칭
동대문에서 명품까지, 패션에서 로고·심볼 등을 포함한 상표는 브랜드 정체성과 가치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다. 최근 몇 년 사이 다양한 종류의 비(非)패션 분야의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한 ‘라이선스 패션 비즈니스’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포화상태인 패션 업계에 새로운 차별화 포인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시장에서 자리잡은 이들 브랜드들은 해외로 역수출도 한다.
F&F가 전개하고 있는 ‘MLB’와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이 선구적인 사례다. 미국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헤리티지를 기반으로 한 ‘MLB’는 1997년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국내 론칭했고, 이후 중국으로 시장을 확장했다. 올해부터는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에서도 매장을 운영중이다. F&F는 2012년 다큐멘터리 채널 디스커버리 라이선스를 활용한 라이프 스타일 아웃도어 브랜드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도 론칭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 도전이 컨셉트다.
더네이쳐홀딩스가 전개하는 아웃도어 패션 브랜드 ‘내셔널지오그래픽’은 2016년 국내 패션시장 론칭 후, 2019년 홍콩 현지 법인 설립 후 현재까지 8개 매장을 운영중이다. 지난해 1~10월 기준 현지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160% 성장하는 성과를 냈다.
이밖에도 뉴스 채널 CNN·BBC, 음악잡지 빌보드, 즉석 카메라 대명사 폴라로이드, 세계 최대 종합 격투기 브랜드 UFC까지 다양한 비패션 분야 상표들을 활용한 패션 브랜드가 잇따라 론칭됐다. 이달 중순에는 한섬이 영국의 지하철(언더그라운드) 로고를 활용한 브랜드를 선보일 예정이다. 9월에는 트라이본즈가 미국 중장비 브랜드 밥캣(Bobcat) 상표를 활용한 패션 브랜드 ‘밥캣 어패럴’을 론칭한다. 모두 한국에만 있는(또는 한국 기업이 처음 시작한) 패션 브랜드들이다.
비패션 브랜드의 IP를 활용한 라이선스 패션 비즈니스의 우선 조건은 확실하면서도 긍정적인 이미지다. 통상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고 브랜드 정체성을 시장에 각인시키기까지 최소 몇 년이 걸린다. 반면, 세계적인 인지도와 대중적인 호감도를 확보한 상표는 기존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더욱이 해당 상표가 오랜 시간 쌓아온 아카이빙을 이용해 패션 컨셉트를 쉽게 확장할 수 있다.
중·베트남으로 브랜드 역수출하기도
130년 역사의 미국 필름·카메라 브랜드 코닥은 국내 기업 하이라이트브랜즈가 2020년 2월 ‘코닥 어패럴’ 오프라인 매장 1호점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패션 아이템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코닥 오리지널리티’를 키워드로 한 코닥어패럴은 코닥 오리지널 로고, 사진 인화지, 필름을 넣어주던 주소봉투 등을 적극적으로 디자인에 반영하고 있다. 큼직한 로고와 노랑·빨강 등의 원색을 특징으로 하는 컬러전략은 ‘사진 빨 잘 받는 옷’으로 인기가 좋다. 올해 5월 말~6월 초에는 젊은이들의 성지 성수동에서 포토존 컨셉의 팝업 스토어 ‘코닥 코너샵’을 열고 무료 사진촬영과 인화 서비스도 선보였다. 골목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작은 필름 가게를 떠올리게 하는 팝업 스토어는 복고 감성을 자극하면서 하루 평균 200명 이상 찾을 만큼 화제가 됐다.
지난해 가을 에스제이그룹이 론칭한 ‘팬암(팬 아메리칸 월드 항공의 약자)’은 1927년 설립된 미국 항공사의 헤리티지를 내세운다. 대륙 간 국제 여행 첫 실현, 최초의 세계 일주 노선 운항 등 팬암의 히스토리를 살린 ‘라이프 저니 기어(LIFE JOURNEY GEAR)’가 컨셉트다. 카페, 전시회에 가거나 쇼핑, 음악 감상 등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여행으로 만들어주는 도구’라는 뜻이다.
이들 라이선스 패션 비즈니스의 주요 타깃은 잘파((Zα)세대다. 잘파세대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Z세대’와 2010년 이후 출생자를 일컫는 ‘알파(Alpha)세대’를 합친 신조어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이 세대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콘텐츠를 쉽게 접해왔고, 실질적인 해외 경험도 많다. 때문에 명문 대학교를 비롯해 유명 해외 상표는 친숙하다. 반면 이들에게 이 상표가 갖고 있는 역사와 헤리티지는 신선하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중년세대에게도 이들 오래된 상표들의 재등장은 반갑다.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주요 타깃인 젊은 층 외 중년세대까지 꾸준히 고객층을 확장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마케팅 요소다.
2021년부터 매년 『친절한 트렌드 뒷담화』를 출판하고 있는 이노션 인사이트전략본부의 김나연 본부장은 “대기업이 아닌 작은 브랜드로 시작하는 게 쉽지는 않다”며 “이미 알려진 상표를 활용한 라이선스 사업은 신뢰감을 주고, 모 기업이 쌓아온 독특한 개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요즘 캐주얼 패션 시장이 너무 젊은 층 위주의 스트리트 패션으로 치우치고 있어 젊어진 중년세대가 살 만한 브랜드가 많지 않았는데, 아날로그 시대를 기반으로 한 스타일을 다양한 세대가 즐길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