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재밌는 거였어?” 여성극 부활 조짐

유주현 2023. 8. 1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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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 리허설 보니
“춘향아, 너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이도령)

“도련님, 헤어지다뇨? 설마 제가 안 따라 갈까봐요?”(춘향)

“15세 느낌을 살려야 돼요. 쓰다듬듯이 볼을 만져야죠.”(연출)

“아직 안 익어서 그래요. 잘할 수 있어요.”(이도령)

3세대 배우 박수빈(오른쪽)과 황지영.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폭염이 절정이던 지난 8일 서울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 이도령과 춘향이의 이별 장면 연습이 한창인데, 보통 춘향전은 아니다. 일단 이도령이 예사롭지 않다. 청바지에 셔츠를 풀어헤친 ‘멋쟁이 할머니’가 깜짝 놀랄만한 동굴저음으로 우렁찬 성량을 내뿜는다. 굽이 10㎝쯤 되는 고무신을 신고 가볍게 연습실을 활보하는 이옥천(78) 선생이다. 음성 뿐 아니라 씩씩한 제스처도 어딘지 ‘남자답다’. 호기심에 “실례지만 결혼하셨냐” 물으니 “내 본처는 판소리요, 애첩은 여성국극”이라며 웃는다. 여성국극 간판 남역(남성 역할을 하는 여배우) 스타다운 오묘한 대답이다.

전성기 땐 극성팬과 결혼사진까지 찍어

8월 3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을 위해 1·2·3세대가 함께 연습하고 있다.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묘한 건 그뿐 아니다. 마당놀이로 유명한 김성예(70) 선생이 쑥대머리를 부르는가 싶더니 까마득한 후배 춘향 황지영(31)이 합류하고, 여기에 이옥천과 박수빈(38), 두 명의 이도령이 더해져 넷이 함께 춘향의 편지 읽는 대목을 엇갈리게 부르는 모습이 마치 뮤지컬의 클라이맥스 장면 같다. 곧이어 월매 역을 맡은 조영숙(90), 변학도 역을 맡은 이소자(93), 이방 역 이미자(79) 선생의 연습이 이어진다. 나이는 숫자일 뿐, 믿기 힘들 정도의 에너지다.
8월 3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을 위해 1·2·3세대가 함께 연습하고 있다.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31일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될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을 위해 모인 ‘레전드’들이다. 또렷한 발음과 차분한 말투는 천상 배우다. “평생 하던 거라 힘들지 않아요. 우리한테 무대는 생명이거든요. 해봤자 생기는 건 없지만 여성국극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죠. 무대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역량껏 노력할 겁니다.” 여성국극 최고의 ‘삼마이(가부키에서 유래된 용어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 조영숙 선생의 말이다.
8월 3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을 위해 1·2·3세대가 함께 연습하고 있다.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이번 공연은 여성국극 1·2·3세대가 최초로 함께 서는 역사적인 무대다. 3세대 배우인 박수빈·황지영이 사고 한 번 제대로 치겠다며 판을 벌였다. 최고령에도 주요 배역인 변학도 역할을 맡은 이소자 선생은 “후배들이 국극을 살려보려 애쓰는 게 너무 이쁘고 고마워서 협조하는 것”이란다. “새로 창작한 부분이 머리에 잘 안 들어가서 연습을 많이 해야 돼요. 옛날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인데, 몸이 따라줄지 모르겠네.”

여성국극은 1948년 탄생한 한국 최초의 뮤지컬이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지만 남장 여배우를 포함해 여성들만 무대에 서는 파격적인 장르로, 1950년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햇님달님’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다 극장 안에서 출산을 한 관객도 있고, 극성팬 성화에 가상 결혼사진까지 찍어줘야 했다니, 이들이 바로 ‘원조 아이돌’이다.

국악계 남성 중심으로 재편, 설자리 잃어

8월 3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을 위해 1·2·3세대가 함께 연습하고 있다.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임춘앵 선배를 보겠다고 팬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입장료로 받은 돈을 쌀가마니에다 발로 눌러 담았을 정도죠.”(조영숙) “극장마다 기마대가 와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정리해야 했어요. 말똥 치우는 게 큰 일이었죠.”(이소자)
여성국극 전성기 시절 '귀향가' 공연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왕자 역의 최고스타 임춘앵, 가운데 앉은 이가 조영숙 선생이다.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같은 동아시아 여성극인 일본의 다카라즈카(宝塚)), 중국의 월극(越劇)이 지금도 건재한 것에 비해 여성국극은 비운의 장르다. 50년대 전성기에는 남성들이 여성국극단을 조직하기도 했지만, 1962년 국립창극단의 전신인 국립국극단이 혼성으로 창단되고 국악계가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여성국극은 점차 설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활 조짐이 보인다. 국극을 소재로 한 웹툰 ‘정년이’가 인기를 끌자 올해 초 국립창극단이 동명 창극을 선보였고,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도 제작 중이다. 꺼질 듯 꺼질 듯 용케 세월을 버텨온 국극의 생명력의 근원은 뭘까. “전통에 바탕한 민속예술이지만, 50년대에 미러볼을 돌렸을 정도로 화려한 장르”라는 게 조영숙 선생의 말이다. “같은 사랑가를 불러도 판소리와는 소리길이 다릅니다. (판소리 버전과 여성국극 버전을 차례로 시연한 후) 이렇게 감정이 다르니 춘향이 안 미칠 수 없겠죠.(웃음) 이게 여성국극의 본질이에요.”

1950년대 여성국극 스타 조금앵(가운데 신랑)이 팬을 위해 촬영한 가상 결혼사진. [중앙포토]
때마침 국악문화산업 부흥을 위한 국악진흥법이 통과된 만큼 새로운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다. 2·3세대가 1세대의 사실상 마지막 무대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찾아오기를 소망하는 이유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도 와서 보면 반해서 ‘국극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냐’고들 하죠. 지금껏 선배들이 사재 털어서 유지해 왔는데, 매력적인 무대가 살아나려면 지원이 필요해요. 후배 양성이 절실한데, 국극 그 자체인 선배들이 살아계실 때 계기가 마련돼야죠.” 2세대 김성예 선생의 말이다.

■ “창작 뮤지컬 콘텐트 국극, 미래무형유산으로 개발돼야”

3세대 배우 박수빈(오른쪽)과 황지영.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레전드’들을 모아 역사적인 무대를 마련한 건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황지영 공동대표다. 두 사람 다 어린 시절 조영숙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며 여성국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사)한국판소리보존회 안산지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리꾼이기도 한 이들은 “안산을 여성국극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단단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Q : ‘레전드 춘향전’은 어떻게 다른가.

A : 박 “춘향도 2명, 몽룡도 2명이다. 70대인 2세대와 30대인 3세대가 엇갈려 짝을 이루고 90대인 1세대는 월매와 이방 역을 맡아 1,2,3세대가 하모니를 이룬다. 눈대목 중심으로 압축하면서 결말은 열어 둘 거다. 어사출두 전에 옥중가에서 마무리 짓는 게 여운이 남는다 생각한다.”
A : 황 “많은 분들이 국극을 전통장르라 생각하지만, 1940년대 후반 생겨난 창작뮤지컬 콘텐트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제작소’인 만큼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Q : 선배들이 사재를 털어 이어왔는데.

A : 박 “이제 선생님들이 연세도 많으시고, 더 이상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지금 시점에 우리가 적을 두고 있는 안산시를 국극의 메카로 삼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려고 한다. 아직 여성국극에 호의적인 분위기가 아니라서 어렵지만, 이번 공연은 크라우드 펀딩도 하고 안산문화재단의 지원도 좀 받아서 공동주최로 준비하고 있다.”


Q : 국극 부활에 열심인 이유는.

A : 황 “어려서부터 무대를 봐서 얼마나 매력적인 장르인지 안다. 한 번만 보면 매력에 빠지게 할 자신이 있는데 그 한 번의 기회가 없었다. 전성기를 누린 1세대에게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 텐데, 내가 느꼈던 희열과 감동을 다시 느껴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A : 박 “남장의 매력은 현실의 남자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섬세한 이상형에 대한 판타지 때문이었다고 본다. 지금은 그런 옛날 맛을 한 번만이라도 느껴 보라는 의미지만, 앞으로의 행보는 과거 답습이 아니라 현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창작을 많이 할 거다. 사랑이야기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로 만들고 싶다. 여성국극은 다양성과 대중성, 포용성으로 만들어진 장르고, 안산이 메카가 될 수 있는 이유도 그 세 가지를 가진 도시라서다.”
연습실에는 여성만 있는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판소리 제자인 안병도 단원국악예술단장이 ‘운영위원장’이란 직함으로 홍보와 실무를 거들고, 서울예술단 최병규 지도위원이 연출을 맡아 연기지도에 열심이었다.



Q : 여성국극은 고정적 젠더 관념을 강화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A : 황 “우리 목표는 젠더 해체다. 그 옛날엔 여성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여성이라는 구분이 붙은 것이고, 그런 역사적 아픔이 있다고 생각해서 여성국극이라는 명칭을 굳이 가져가는 거다. 요즘 흔한 젠더 프리극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장르의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현대와 소통하려고 한다.”
A : 박 “그래서 남성 제작진과 같이 만든다. 좀 같이 나서줘야 예술적 장르로서 대명사가 될 수 있지, 여성들끼리 으쌰으쌰하면 동호회에 그칠 수 있다. 예술적 가치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남녀가 같이 만들어야 지역에서 전국으로, 또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 지속 가능하기 위한 과제라면.

A : 박 “국극이 무형문화재가 돼야 한다는 선배도 있지만, 전통으로 물러나 도태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국극은 태생부터 전통이 대중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래무형유산으로서 지속적으로 개발되어야 하는 장르다. 그러려면 먼저 지자체의 협조가 필요하다.
A : 황 “그래서 안산문화재단과 많은 얘기를 하고 있고, 이번 공연도 ASAC(안산문화예술의전당 기획 프로그램) ‘주목과 발견’ 시리즈의 첫 프로젝트로 출발하게 됐다.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인재도 기르고, 여성국극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평을 여는 것이 최종 목표다.”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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