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도 산도 황톳빛 ‘폭풍의 화가’…꿋꿋함 본받고 싶었죠

정영재 2023. 8. 1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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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신문선, 제주 화가 변시지에 꽂힌 이유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이 자택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변시지 화백의 작품 ‘한라산’(63x53㎝)을 보여주고 있다. 최기웅 기자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은 축구 국가대표와 해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국내 스포츠인 사이에서 손꼽히는 미술 애호가이자 컬렉터다. 2019년 서울 홍익대 정문 앞 자신의 건물을 리모델링해 와우갤러리를 열었다. 개관식에서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대학이 있는 홍대 앞에 제대로 된 갤러리 하나가 없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소비와 향락이 흐르는 이 지역에 예술과 문화의 새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포구 상수동 자택에 자신이 수집한 그림과 조각 등을 전시해 놓고 ‘신문선 공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인들을 초대해 작품을 보여주고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게 그의 큰 즐거움이다.

“현실과 타협 않고 자신 작품 세계 관철”

생전 변시지 화백의 모습. [사진 변정훈]
요즘 신 관장이 꽂힌 쪽은 ‘폭풍의 화가’ 변시지(1926~2013)의 그림이다. 제주 출신인 변시지는 일본에서 ‘천재 청년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1975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바람과 파도, 초가와 돌담, 조랑말과 까마귀 등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담은 ‘제주화’를 완성했다. 그의 그림에선 바다도 산도 땅도 모두 황톳빛이다. 수평선과 돌담, 일엽편주 배 한 척과 소나무, 까마귀와 조랑말 등은 간결한 검은 선으로 표현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지팡이 짚은 노인은 늘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작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봐도 된다.

신 관장이 변시지에게 꽂힌 이유는 ‘화풍의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변신’ 때문이다. 변시지는 한옥의 기왓장 개수, 나뭇잎 숫자까지 똑같이 맞춰 그린다고 할 정도로 치밀한 사실주의 화풍이었다. 그런데 거칠지만 담대하고, 단순해 보이는데도 깊이가 느껴지는 ‘폭풍의 화가’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하면 화풍이 이리도 크게 변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경외감으로 신 관장은 화가의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2013년 벽두에 제주로 날아갔다. 서귀포 정방폭포 근처에서 만난 화가는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저는 왜소한 독거노인이었다. 소주의 힘을 빌려 독백하듯 그는 이야기를 토해냈다.

여섯 살 때 오사카로 건너간 변시지는 소학교 2학년 때 덩치 큰 5학년과 씨름을 하다 크게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외출이 어려워진 그는 방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고, 타고난 천재성을 서서히 드러낸다. 사실주의 대가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가 된 변시지는 스물두 살에 일본 최고 권위의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 입선한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의 그림을 본 심사위원이 말했다. “이 작품을 인정하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

이듬해 광풍회전에서 변시지는 최연소 나이로 최고상을 수상한다. 1949년에는 광풍회 심사위원으로 선정돼 또다시 일본 미술계에 광풍을 일으켰다.

제주로 내려가기 전인 1969년의 변시지 작품 ‘가을 부용정’(65x54㎝). 치밀한 사실주의 화풍이다. [사진 변정훈]
변시지는 1957년에 귀국을 결심한다. 서울대에서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 미술계는 변시지라는 ‘위험인물’을 담기엔 너무 작았다. 노골적인 질시와 따돌림이 있었다. 강의도 주지 않았다. 쫓겨나듯 서울대를 떠난 그는 마포중·고 교사, 서라벌예대 강사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북한 최고권력자 가족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의 감시에 늘 시달렸다.

결국 1975년 변시지는 가족을 서울에 남긴 채 바다를 건넌다. 제주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몰입한 것이다. 수없는 불면의 밤과 깡소주, 별도봉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하는 시절을 견딘 뒤 그는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우주를 만들어낸다.

변시지는 말했다. “진정으로 내가 꿈꾸고 추구하는 것은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다. 인간이란 존재의 고독감,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내 작품의 감상자들이 그런 정서를 공유하며 위안 받았으면 한다.”

신 관장이 변 화백을 만나고 몇 달 뒤 전화가 왔다. “나 안암병원이요. 병문안 올 필요 없어요. 며칠 뒤 소주 한잔 합시다.” 그리고 한 달 뒤 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그림 속 지팡이 짚은 노인은 작가 자신

‘폭풍의 화가’로 변신한 뒤인 1991년 작품 ‘태풍’(38x5㎝). [사진 변정훈]
제주 롯데호텔 1층에 있는 갤러리 ‘아트제주 스페이스’에서 변시지 개인전(1차 8월 13일까지, 2차 8월 15일~9월 30일)이 열리고 있다. 이 갤러리의 강민 관장은 “변 선생님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관철하신 진정한 예술인이셨다”고 말했다. 강 관장은 작품 가격을 귀띔해 주며 “작품 사이즈가 커질수록 호당 가격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변 선생님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서귀포 천지연폭포 근처에는 기당미술관이 있다. 변시지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기당 강구범 선생이 미술관을 지어 1986년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2층에는 변시지 작품 상설 전시관이 있고, 화가의 화실도 재현해 놨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는데도 1년에 3만여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기당미술관에서 공익재단 ‘아트시지’의 변정훈 대표를 만났다. 변 화백의 아들인 변 대표는 고려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고 신한은행에서 일하면서 모스크바 지점을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아버지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변 대표는 “변시지미술관을 새로 만들기 위해 내년에 오픈될 STO(증권토큰) 제도화에 맞춰 작품 일부를 증권화 하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 미술관은 전시실과 수장고 등을 갖춰 아버지의 작품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변 대표는 아버지의 50대 이후 작품 5300여점을 담은 7권짜리 전작도록을 최근 완성했다. 그는 “전작도록은 미술계에서는 ‘핵무기’라고 불린다. 위작(僞作)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그만큼 작품 소장자에게 안심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변 대표는 신문선 관장과의 인연을 얘기하며 ‘오프사이드 사건’을 언급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에서 부심이 오프사이드 깃발을 든 상태에서 스위스 선수가 골을 넣었다. 한국에선 오심 때문에 졌다고 난리가 났다. 해설을 하던 차두리는 “저건 사기”라고 했다. SBS의 신문선 해설위원만 “오프사이드가 아니다. 부심이 깃발을 들었더라도 최종 판정은 주심이 한다”고 밝혔다. 그는 타의로 마이크를 놓아야 했고, 평생 먹을 욕을 한꺼번에 먹었다. 변 대표는 “당시에 신 위원이 아버지 작품을 보면서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본받고 싶다고 하셨다”고 소개했다.

신 관장은 변시지의 작품 48점을 소장하고 있고, 와우갤러리에서 변시지 유작전도 열었다. 신 관장은 “예술가는 탄생 100주년 같은 특정 시점에 재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죠. 변 화백도 탄생 100주년인 2026년에 맞춰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질 거라고 기대를 합니다”고 말했다. “골이에요”를 외치던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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