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에서 깨어나 맨정신으로 춤춰요, 우리[안주연의 래빗홀]
금주 다이어리
클레어 풀리 지음·허진 옮김
복복서가 | 471쪽 | 1만6500원
“나는 와인 덕분에 차분해지고, 활기를 찾고, 축하하고, 동정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와인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왔다.”
변화를 결심하는 순간은 돌연 다가오기도 합니다. <금주 다이어리>의 클레어에게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오전, 그는 더 이상은 안 된다며 지금 들고 있는 잔이 마지막 잔이라고 결심합니다. 술을 연료 삼아 사교모임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와인을 끊어도 관계와 일상이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말이죠.
단주 초기의 클레어에게, 저의 ‘술이 없어진 삶’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저는 술에 꽤 센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다들 최선을 다해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요. 저도 지기 싫어서, 스트레스 풀려고, 사회성 좋아 보이려고 열심히 마셨는데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 술주정 없이 얌전히 귀가하다 보니 더 흔쾌히 마셨습니다. 주변에 과음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나 정도면 적당하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계속 마셨어요.
그러던 중에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과 사생활은 별개라고 생각했지만,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진료하고, “그런데, 술이랑 약이랑 같이 먹어도 되나요?” 같은 질문에 맞닥뜨리면서 술에 대해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어요. 과도기 몇년간은, 술자리에서 금욕적으로 굴고 싶지 않은 사적 자아와 진료실에서 무알코올 맥주를 권하는 직업인 자아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어느 날 궁금해졌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꼭 술을 먹어야 할까? 솔직한 이야기를 하려면 술이 있어야 할까? 진료실에서는 술 한 방울 없이도 살기 싫은 이유부터 어린 시절 일화까지 다 이야기하는데…. 변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사람들과 맨 정신으로 친해지고 싶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속 얘기를 하는 데 전문가라고! 이렇게 시작된 술이 없는 삶은, 걱정한 것처럼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더 활력 있고, 의식적이고, 즐겁답니다. 못 믿겠다면 한번 시도해보시길 권합니다.
클레어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며 과음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세 아이 육아에서 오는 소진과 초조함을 피하기 위해 더 깊이 술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립되는 상황과 아픈 감정들을 스스로, 혹은 도와줄 사람들과 풀기보다는 어떤 물질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중독의 본질입니다.
고립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실태조사가 있어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중독포럼이 성인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이후 주 4회 이상 음주를 하던 사람들의 음주 횟수가 더 늘었으며, 스마트폰 이용·온라인 게임·도박 등의 이용 횟수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때 뇌에서 애착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요, 옥시토신은 보상과 관련된 도파민 분비 또한 촉진하기에 우리는 애착행동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애착이 손상되면 옥시토신 감소와 이에 따른 도파민 분비 감소가 나타나, 누군가는 부족한 도파민을 채우기 위해 음주, 약물중독, 폭식, 온라인 게임, 무절제한 쇼핑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외로우면 중독에 취약해지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 부담스러운 진실을 알아가기 위해, 다음 책을 소개합니다.
애착 장애로서의 중독
필립 플로레스 지음, 김갑중·박춘삼 옮김
NUN | 389쪽 | 3만5000원
<애착 장애로서의 중독>은 중독을 이해하는 데에 애착이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중독 분야 종사자나 치료 중인 당사자, 혹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본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애착’은 누군가가 왜 중독에 빠지고 벗어나기 힘든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쓸모 있지만, 중독으로부터의 회복을 계획하고 돕는 데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은 금주 초기에 친구들도 바꾸고 놀던 장소도 바꾸어서 새로운 애착이 주는 강력한 자기 조절력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줍니다. 이후에는 애착 대상으로부터 충분히 수용받으며 절제의 날들을 우직하게 밀고나가야 한다고 격려하고요. 중독에 대한 취약성을 인정하고 중독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어려움을 야기했고 관계에서 어떤 것들을 놓치게 했는지 적어보는 것이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눈치 채셨는지요? 이것들은 바로 클레어가 금주를 해낸 비결이기도 합니다. 여러 이유로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모임(AA)에 가지 못한 클레어는, ‘엄마는 남몰래 술을 마셨다’라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취약성을 온전히 드러내며 용감한 소통을 시작합니다. 블로그는 술로 일상을 잠식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단주를 격려하는 애착의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이 소통과 연결이 바로 클레어가 다시 맨 정신의 삶으로 돌아온 이유이자, 의미가 되어줍니다.
유교 경전의 구절처럼, 삶은 배움의 최전선에서 흔들리며 자신을 던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잠시 멈출 수도, 쉽게 그만둘 수도 없고요. 그 속의 불완전한 우리는 힘들고, 부끄럽고, 숨고 싶습니다.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당당한 저 사람도, 괜찮아 보이는 이 사람도, 모두가 그래요. 이제, 숨지 말고 나와서 함께 맨 정신으로 춤춰요.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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