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적 필사 출판의 종언…활자 만난 지식, 상식이 되다[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기자 2023. 8. 1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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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쇄된 책을 읽고 쓰다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1454년 프랑크푸르트서 공개된 구텐베르크 42행 성서 ‘대성공’

활판에 잉크가 얹혀 거꾸로 박혀 있던 글자들이 책으로 만들어진다. 이 같은 인쇄본은 책과 관련된 모든 활동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454년 10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에 등장한 인쇄된 책의 견본 몇 장이 서양의 지식 풍경을 영원히 바꿔놓는 일이 일어났다. 2년 전인 1452년 마인츠에서 설립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서 1286쪽짜리 2권으로 인쇄한 42행 성경의 일부 견본을 세상에 선보인 날이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본 이전에도 목판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나 양피지에 찍어 인쇄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틴어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에 대해 가동활자(movable type)를 만들고 이들을 조합해 인쇄할 판을 구성한 것은 서양 최초의 시도였다. 구텐베르크는 이 인쇄기의 성공적인 성능을 뽐내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책을 선보여야 했다. 그의 42행 성경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견본만 전시했을 뿐인데도 이미 선주문으로 다 팔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구텐베르크 불가타 성서 제1권 첫 페이지.

구텐베르크의 성공은 오랫동안 필사본을 만드는 데 관여했던 사람들이 서서히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7회에서 잠시 소개했던 베스파시아노는 1440년대부터 여러 후원과 협력 관계 속에서 피렌체의 서적상을 이끌며 책들을 통해 인문주의의 부흥을 뒷받침해왔다. 그러나 인쇄된 책들로 인해 책을 제작하고 거래하는 새로운 흐름이 점점 더 거세진 1480년 즈음 출판 시장에서 은퇴한다. 필사본을 통해 지식 복원의 절정기를 보낼 수 있었던 그는 마인츠에서 시작된 인쇄기가 피렌체에 들어오면서 인쇄된 책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금속조판에 의해 찍힌 책이 손으로 눌러쓴 책을 결코 대체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베스파시아노는 회고록에서 우르비노의 군주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도서관이 다른 도서관들에 비해 특별히 더 빼어난 이유 중 하나로 인쇄본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을 꼽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은 순식간에 필사본을 대체했다.

“몬테펠트로 공작은 다른 많은 훌륭한 후원을 했을 뿐 아니라 3만 두카트의 비용으로 이 고귀한 작업을 완료한 후, 주홍색과 은색으로 책들을 제본해 모든 작가의 작품에 품격 있는 마무리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가장 으뜸인 성경을 금색 양단으로 덮은 것을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의학서, 철학서, 역사서 그리고 오늘날의 의학서적들을 주홍색과 은색으로 제본해 화려하고 웅장한 매무새를 갖추게 했다. 이 도서관의 모든 책은 매우 훌륭한 것들이었고 모두 펜으로 쓰인 것들이었다. 만약 인쇄된 책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훌륭한 책들의 조합에 포함시키기 부끄러웠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노의 이러한 생각은 사실 구텐베르크가 인쇄본을 고안하면서 처음 품었던 생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세상에 처음 선보일 인쇄본이 가능하면 기존의 필사본들처럼 보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쇄본에 사용할 가동활자들을 만들 때 필사본들에서 사용된 손글씨 서체들을 그대로 모방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의 활자 인쇄본은 아름다운 필체를 지닌 필사가의 작품처럼 보인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손글씨는 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필사본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나타내기도 했다. 같은 작품을 옮겨 쓴 둘 이상의 필사본이 있을 때 각각의 사본은 지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와 더불어 서체에 의해서도 구별되기 때문이다.

비록 초기의 기술적 한계 때문이기도 했으나,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은 장식적 요소를 책의 고유함을 확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쇄된 책들에 들어갈 여러 삽화와 문단 첫 글자의 채색 작업 등의 장식적 요소들은 인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채워 넣도록 비워져 있었다. 손글씨 서체의 모방이나 장식 요소의 마무리 작업 등을 통해 가능하면 지금까지의 필사본 전통과 꼭 닮은 모습으로 인쇄본을 고안한 이런 노력들은 인쇄본이 결국 필사본을 대체할 운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만큼 오랜 필사본 전통 속에서 책이 그 속에 담겨야 할 내용에 있어서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형태에 있어서도 하나의 확고한 규범을 갖게 됐던 까닭이다.

그러나 필사본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며 공존할 수단으로 인쇄본을 바라봤던 초기 인쇄업자들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인쇄본의 등장은 책을 만들고, 팔고, 사고, 읽고, 쓰는 일체의 활동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왔다. 지난번 두루마리로부터 코덱스 형태로의 전환으로 인한 변화들을 되짚어봤던 것처럼, 이제 인쇄본으로 인해 어떤 새로운 읽기, 쓰기 경험이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고유의 작품’이던 필사본의 7분의 1 가격에 인쇄본 책 쏟아지고
대학 중심의 두꺼운 독자층, 읽고 쓰며 ‘소통’의 순환 체계 확립

책의 인쇄는 책 자체가 수행하는 내부적 기능의 변화보다는 책을 읽고 쓰는 외적인 환경과 관련해 더 중요한 변화들을 초래했다. 그중 단연코 가장 중요한 첫번째 변화는 독자층이 광범위하게 확대됐다는 점이다. 책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더 많은 독자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인쇄본을 구할 수 있게 됐는지를 추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법률서적 중 인기가 있었던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의 경우 14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존 필사본의 7분의 1 가격으로 인쇄본을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단순히 책의 가격이 저렴해졌다고 해서 무조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늘어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1200년대부터 하나둘 설립되기 시작한 유럽의 여러 대학들에 소속된 학문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인쇄된 책들을 얼마든지 받아낼 두꺼운 수요층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독자층의 확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독자들이 독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상당수는 다시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저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고, 읽고, 다시 또 자신의 책을 씀으로써 다음 사이클에서 살펴볼 중요한 지적 행위 ‘소통하다’가 가능하게 됐다.

책 시장서도 경쟁 심화…대중적으로 ‘잘 팔리는’ 글이 선택받아

두번째 변화는 책 시장에서 경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서양의 책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구텐베르크의 최초의 인쇄본 이후 책의 인쇄와 관련한 여러 실험적 시도를 했던 1500년까지의 인큐내뷸러(Incunabula) 시기에 인쇄된 책이 그 이전 필사에 의해 만들어졌던 책의 수를 능가한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책이 쏟아져 나오면서 책 시장 안에서의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한다. 물론 책 시장 자체는 몇몇 고대 작가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책 시장은 주로 책을 팔 사람과 살 사람을 중개하는 역할만 맡을 뿐이었다. 책이 귀하던 시대에는 경쟁이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1500년대 이미 250개에 달하는 도시에 책을 인쇄하는 곳이 생겨날 정도로 책을 공급하는 곳이 급격하게 늘면서 이제 책은 본격적인 경쟁의 시대에 돌입한다. 이 경쟁은 책의 가격을 낮추는 데도 기여했지만 인쇄업자로 하여금 인쇄기의 설비 비용과 종이나 잉크 등의 재료 비용 등을 회수하는 것을 더욱 절실한 과업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따라서 경쟁 속에서 파산을 피하고 생존하기 위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이전에는 지식을 복원하고 수집하기 위해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를 주로 고민했다면 이제는 무엇이 팔릴 만한 책인가를 고민해야 할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학교와 교회 같은 기관에서 많은 수요를 확보할 수 있는 책들은 일정 정도 판매가 보장되는 주수입원이 됐지만, 이 안전한 수입이 중요해질수록 어떤 작품들은 탁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인쇄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이제는 전통적으로 인기를 끌던 고전도, 명성이 높은 인문주의자들의 최신 저작들도 원고가 다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할 곳을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지식을 수집하고 책을 서재에 진열함으로써 자신의 지식 수준을 과시하기 원했던 과거의 후원자들은 필사본 책의 제작을 통해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소수의 후원자들이 아니라 다수의 독자 대중에게 책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인쇄본의 시대가 찾아오자 이제는 시장의 경쟁 속에 더 주목받고 눈길을 끌기 위해 책의 내용이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1600년대 이후 라틴어로 쓰인 책보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독자 대중들의 일상 언어로 기록된 책이 더 많아진 것은 경쟁 속에서 다양해진 독자들의 수요를 채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책은 비단 도서관에 소장될 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서점에서 더 잘 팔릴 매력적인 대상으로도 거듭나야 했다.

지식의 양 폭발적으로 늘고 확산 빨라져…큐레이션 필요성 대두

마지막 변화는 책이 보급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는 점이다. 책을 얼마나 빨리 인쇄해 보급할 수 있었는가는 책의 분량 및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보통 한 번에 300~500권을 인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추정해본다면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이제 책은 이전에 비해 몇십 배는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게 됐다. 인쇄물이 이렇게 신속한 전파 속도를 확보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인쇄물이 곧 통신의 역할을 맡았다.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된 책들은 동시대적 정보를 더욱더 간결한 속보물의 형태로 보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사건들과 논란의 내핵을 이루던 견해들이 책에 담겨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공공장소에서 이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논의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 초기 신문과 저널의 원형이 이 시기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인쇄물의 빠른 확산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 모든 외적 환경의 변화들이 누적된 결과로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책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지식의 표준이 마련되기도 했고 동시에 지식의 경계가 확장되기도 했다. 더 많은 독자들이 같은 내용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독자들이 공유하는 지식의 표준이 생겨났다. 비록 지식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이때 작가들의 허락 없이 작품들을 마음대로 일부 수정·변조해 책을 내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면서 인쇄된 책들이라 하더라도 같은 작가의 같은 작품을 다르게 기록한 책들이 빈번하게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도 예전에 소수만이 읽을 수 있던 책을 다수가 읽을 수 있게 되면서 공유된 책이 해당 지식의 표준으로 부상했다. 애초에 독자들이 몇 명 되지도 않을 때는 지식의 표준이란 말을 꺼낼 아무런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책은 소수의 한정된 사람들만이 읽고 쓰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열린 세계로 확장됐다. 이 열린 세계에서는 책을 통한 지식의 생산과 소비의 양상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해진다. 과거에, 물론 그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으나, 베스파시아노처럼 특별한 몇몇 사람들은 피렌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책들의 목록과 그 흐름을 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매업자들이 신간을 알리는 전단을 통해 책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했을 만큼 책이 가속적으로 만들어지며 더 멀리 퍼져나가고 유입되자 이제 그 어느 누구도 그가 속한 도시에서 출판되는 책과 지식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으로부터 대략 600여년이 지난 지금 출판문화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은 총 6만1181종에 이른다.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들에서 매년 출판되는 책들의 방대한 수를 헤아려보면 이 지식의 망망대해 속에 무엇을 어떻게 읽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혀갈지 그 길을 안내해줄 나침반이 절실해진다. 다음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디지털 지식의 큐레이션이 읽고 쓰는 일과 관련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지 한번 상상해보기로 하자.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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