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 새만금의 여름은 알고 있다
“새만금 도로 옆에 팔각정이 하나 있어. 거기서 보면 잼버리 야영장이 한눈에 보이지. 부안 갈 때면 내려서 살펴보았어. 수만명이 온다니 그런 장관이 어디 있겠는가. 근데 볼 때마다 어딘가 허술하고 썰렁해. 도대체 활기가 없다 이 말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지. 이래서 될까, 이래도 괜찮을까. 늦은 봄이 돼서야 건물 한 동을 짓더라고. 하여튼 뭔가 불안했어. 또 이상한 것은 수만명이 온다는 국제행사가 코앞인데 언론들이 조용하더라고. 다른 국제행사는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가. 시시콜콜 들춰내고 부풀리고. 그런데 새만금은 달랐어. 결국 이 지경이 된 거야. 아무도 챙기지 않았지. 그 누구도 와보지 않은 거야. 동네잔치도 이렇게는 안 해. 다들 마음은 다른 데 있었어. 도대체 이게 뭣인가. 화나고 창피해 죽겠네.”
새만금 지역 인근에 사는 친구가 전화로 쏟아낸 말이다.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다. 이렇게 지구촌 청소년들의 야영축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는 ‘준비 부족’으로 망가졌다. 과거에는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 행태를 개탄했지만 이번에는 공무원들이 아예 숨어버렸다.
조직위원회는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이 왔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국제대회를 개최할 때마다 찬사를 받았던 코리아의 명성은 폭염에 녹아버렸다.
대원들이 철수하자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대뜸 지시했다. “한국의 산업과 문화, 역사와 자연을 볼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을 긴급 추가하라.” 이에 한덕수 총리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재빨리 명령을 받들었다. 브리핑 맨 앞에 “대통령께서 지시한 대로”를 복창했다. 흡사 대통령의 혜안과 용단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투였다. 이를 보며 국민들은 혀를 찼다. ‘저들은 대통령만 보고 있구나.’
불현듯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머리 전두환이 1980년 8월 전역식을 할 때였다. 당시 국방장관이 축사를 하면서 전두환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한마디 찬사를 하고 전두환을 돌아보고, 다시 한 대목을 읽고는 안색을 살폈다.
당시에는 역겨웠지만 지금은 가소로운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세상이 바뀌고 민주화가 한참 진행되었다는데 이 무슨 해괴한 상상이란 말인가.
어떤 이는 대통령이 혼자 뛰어다닌다며 안쓰럽다고 했다. 대통령의 자질과 성품을 상찬하며 각료들의 무능을 꾸짖었다. 그렇다면 그런 각료를 발탁한 것은 누구인가. 발탁한 장관이 무능하고 태만해서 지탄을 받고 국회 탄핵을 받았는데도 감싸고 품어준 게 누구인가. 그러니 장관들이 일을 찾아서 하지 않고 용산만 쳐다보는 것 아닌가. 대통령의 깨알 같은 지시는 공직 사회에 이상이 생겼음이다. 그것은 각료들의 입지를 깎아내리고 결국 대통령의 권위를 허문다. 공무원들은 진보와 보수 정권을 거치며 어디에 얼마큼 발을 담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참신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의외의 인물이 보일 뿐이다. 정치경력이 일천해서 인재가 곁에 없고,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 또한 없으니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점입가경이다. 어찌 그리 진부하기 짝이 없는 문제적 인물들만 골라서 기용하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급기야 ‘내가 해봐서 안다’는 이명박 측근들을 대거 입성시켰다. 실패한 정권을 주물렀던, 아주 멀리 흘러간 인물들이 백발을 날리며 처진 눈꺼풀을 치켜뜨며 돌아와 어전회의를 하고 있다. 아첨에 능하고, 상식과 공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민심을 비트는 데 능한 자들이다.
때가 묻은 자, 약점이 있는 자들은 부리기가 쉽다. 그들은 해봐서 알기에 보고를 잘하고, 그래서 듣기에 좋다. 하지만 저들은 부리는 자의 속셈을 꿰뚫어본다.
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해봐서 아는 족(族)’은 앞으로 자기네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뭉쳐서 용산을 에워쌀 것이다.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더 많은 것들을 탐할 것이다. 해봐서 아는 족에 둘러싸여 정녕 허수아비 춤을 출 것인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유독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는다. 국격이 추락하고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국민이 살고 있는데, 같은 공복(公僕)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리 다른 나라가 되어가는가. 새만금의 여름은 알고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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