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친구라는 유토피아

2023. 8. 1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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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컸던 19세기에
친지들과 식사자리 따위
평안한 일상 그린 르누아르
잔인한 여름을 보내면서
격변의 시대를 유유히 살아간
그의 태도를 이해하게 돼
훈훈한 행복 바이러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 '선상 파티의 점심 식사'.

폭우에 폭염에 태풍까지, 잔인하기 그지없는 2023년의 여름이다. 날씨만큼 따갑고 숨이 턱턱 막히는 뉴스도 자꾸 전해져 더 열불이 난다. 코로나 시기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주변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두지 못했던 이들의 고립이 더욱 심화된 듯하다. 원래부터 주위와의 연결고리가 약한 이들에게는 홀로 보낸 그 오랜 시간이 더 비뚤어지고 더 엇나가면서 세상 탓, 남 탓만 하는 못된 심보만 키우는 기간이 되었나 보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자신과 주변을 챙기며 서로 다독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 '선상 파티의 점심 식사'가 갑자기 눈길을 확 사로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 작품은 몇몇 남자의 가벼운 옷차림에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 말의 어느 여름, 강가에 정박한 선상 레스토랑에서 지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르누아르가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제목과 달리 식사는 이미 끝난 듯하지만, 사람들은 수다를 떨고, 농담을 하고, 풍경을 바라보고, 반려견과 놀고 있다. 그야말로 친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격식 없이 흥겨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기술적으로 따지고 보면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등 다양한 장르를 한 작품에 모아놓은 수작이기도 하다. 특히 선상 난간이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누면서 한쪽으로는 뒤에 펼쳐진 시원한 강변 풍경을, 다른 한쪽으로는 많은 사람을 몰아넣은 구도를 통해 다닥다닥 가까이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던 파티의 분위기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가장 앞쪽에 모자를 쓴 남성은 동료 화가이자 미술 후원자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 왼쪽에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여성은 모델로 활동하다 후일 르누아르의 배우자가 되는 알린 샤리고, 그리고 그 외에도 이름을 특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작품 속에 대거 등장한다. 지금 보면 마치 인싸들의 모임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들은 거의 모두 르누아르가 유명해져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지, 당시에는 그저 작가와 친분을 나눴던 평범한 친지일 뿐이었다.

그림 속에 보이는 상차림이나 의상 등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두가 매무새를 다듬고 온 듯 조금은 신경 쓴 모습으로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한 것이 보인다. 르누아르에게 친구들과 함께하는 어느 여름 오후의 조촐한 파티는 그야말로 더 바랄 게 없는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그런 신념은 행복으로 가득 찬 작품으로 고스란히 옮겨져서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고백건대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데 탁월했던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산업혁명과 도시화 이후 계층 간의 빈부격차가 커지고 개인적 고립이 심화되던 시기, 당시 사람들도 '현대'라 칭하게 된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두가 고민하던 19세기 말에 다뤄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았는데, 겨우 친지들과 모여 보내는 즐거운 시간을 그리고 있었다니. 오랜 기간 필자는 르누아르가 그저 주위 사람들을 곱게 그리면서, 산적한 사회 문제에서 도피해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려고 한 미술가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여름을 보내면서 격변의 시대를 유유히 산 그의 태도가 이해가 되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주는 값진 교훈을 보게 되었다. 주위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훈훈하고 따사로웠던 르누아르는 작품을 통해서 오늘까지도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조금 정성을 들인 친지들과의 식사 자리. 힘든 시기일수록 이런 작고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가족과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보듬으며 조금 덜 삭막한 세상이 되도록 함께 응원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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