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맛’ 유일무이 싱가포르[주식(酒食)탐구생활㉖]

박경은 기자 2023. 8. 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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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여행 단 한나라 간다면 단연 싱가포르
유서깊은 래플스 호텔엔 칵테일 싱가폴 슬링 탄생시킨 ‘롱바’
오이 하나에 칼질 100번...중식 레스토랑 ‘이 바이 제레미 렁’
최고급 미쉐린부터 한끼에 3000원인 호커 센터까지

미식이 여행의 목적이 된 시대. 익숙한 맛, 궁금한 맛, 모르는 맛, 새로운 맛을 찾아 음미하고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가방을 꾸려 비행기에 오르는 여행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름 모를 남프랑스 산간지방을 달려서 찾아가야 하는 미쉐린 스리스타 레스토랑, 수많은 아티스트의 사연과 예술혼이 촘촘히 서려 있는 로마의 카페 그레코, 현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쌀국수를 먹는 베트남 호이안의 야시장 등등 푸디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행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한 나라만 꼽아야 한다는 고약한 질문을 받는다면? 싱가포르는 더할 나위 없는 목적지다. ‘미식의 성지’니, ‘맛의 천국’이니 하는 관용적 찬사는 괜한 소리가 아니다. 말레이시아, 중국, 인도를 주축으로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빚어낸 독창적 다문화, 전 세계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라이프 스타일, 일반화된 맞벌이 및 고소득으로 발달한 외식 소비시장 등 맛의 잔치가 펼쳐질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최고급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부터 우리 돈으로 3000원만 내면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호커센터가 곳곳에 있고 선택의 폭 역시 광대하다. 이종 문화가 만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온 과정은 싱가포르 음식 문화의 주축이다. 도전과 자극을 얻고 상상력을 발현하기 원하는 세계 각지의 셰프들이 싱가포르로 모여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심술궂은 질문을 던져보자. 초호화 호텔과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즐비한 싱가포르에서 싱가포르를 맛볼 단 하나의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면? 정답은 없겠지만 추천할 만한 답은 있다. 래플스 호텔이다. 싱가포르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 1887년 문을 연 뒤 싱가포르 근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건물 자체가 문화재다. 찰리 채플린, 서머싯 몸, 헤밍웨이, 엘리자베스 여왕, 만델라 대통령, 칼 라거펠트, 레이디 가가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싱가포르를 방문해온 국빈이나 셀러브리티들은 고민할 여지 없이 선택하는 숙소였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음료 싱가포르 슬링. 1915년 래플스 호텔 롱바에서 처음 선보였다
롱바 입구에서 입장을 대기중인 관광객들

래플스시티, 선텍시티 등 사방에 서 있는 초고층 빌딩 사이에 최고층이 3층인 래플스 호텔은 나지막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던 ‘팜 코트(Palm Court)’를 둘러싼 긴 회랑을 따라 객실과 레스토랑, 바가 자리를 잡고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표현을 빌리자면 ‘품위 있는 센티멘털리즘’으로 가득하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이 태어난 롱바(Long Bar), 1896년 문을 열면서 들여놓았던 당구대가 2세기를 거친 지금까지 그대로 놓여 있는 레스토랑 ‘바 앤드 빌리어드 룸(Bar & Billiard Room)’,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기둥이 흑백의 대조를 이루며 웅장한 첫인상을 만들어내는 그랜드 로비, 그리고 이곳에서 맛보는 애프터눈티 세트. 100년이 넘은 북인도식 레스토랑 티핀룸(티핀은 인도에서 도시락통을 의미한다), 서머싯 몸과 조지프 콘래드, 헤밍웨이, 키플링, 네루다 등 이곳에 머무르며 예술혼을 피웠던 작가들을 기념하는 바 ‘라이터스(writers)’. 시간의 가치와 숙성의 미학이 빚어내는 품위는 싱가포르에서 오롯이 래플스만이 독점한 자산이다.

북인도 레스토랑 티핀룸에서 직원이 티핀에 담긴 커리를 서빙하고 있다

롱바에 들어가려면 길게 늘어선 줄을 피할 수 없다. 싱가포르 전역에서 싱가포르 슬링을 팔지만 ‘원조’는 롱바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일 터다. 바닥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땅콩 껍데기가 넘쳐나고 천장에는 큼직한 선풍기가 돌아간다. 진과 파인애플주스, 라임주스 등을 섞어 싱가포르 슬링을 만드는 바텐더를 배경 삼아 인증사진을 찍는 세계 각지의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들뜨고 신난 표정이다.

도서관처럼 벽면이 꾸며진 래플스 호텔 라이터스 바

물론 스토리만으로 까다로운 푸디들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는 없는 일. 래플스의 레스토랑에선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거나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조합하는 시도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이 바이 제레미 렁’(藝 by Jereme Leung)은 스타 셰프 제레미 렁이 이끄는 중식 레스토랑이다. 이미 세계 9개 도시에서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특정한 지역 요리가 아닌 중국 전역을 아우르는 현대적 요리를 표방한다. 예컨대 윈난성 삼림에서만 자라는 버섯과 광둥식으로 절인 채소에 하이난식 소스를 결합하는 식이다. 오이 하나에 100번 이상의 섬세한 칼집을 내 1m 길이로 늘인 뒤 해산물과 함께 말아 간장 소스를 버무린 요리는 마법을 보는 것 같다.

중식 레스토랑 ‘이 바이 제레미 렁’에서 선보이는 오이 요리

미쉐린 원스타인 라 담 드 픽(La Dame De Pic)은 세계 최고의 여성 셰프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앤 소피 픽이 아시아에 처음으로 낸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프랑스 발랑스에 있는 메종 픽으로 미쉐린 스리스타를 받은 그는 라담 드 픽에서 계절에 따라 정통 프렌치 혹은 일본이나 싱가포르 현지의 스타일을 가미한 퓨전 프렌치를 선보이고 있다. 7월 하순부터 시작한 시즌 메인 메뉴에는 이베리코 등심구이, 프랑스 브레스산 비둘기구이가 포함된다. 말차를 넣은 피로 만든 라비올리에 그린커리 락사를 곁들인 앙트레, 콩테치즈로 만든 아이스크림에 인도산 큐민, 후추를 뿌려 튀일을 얹은 디저트도 싱가포르이기에 가능할 법한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모습이다. 부처스 블록(Butcher’s Block)은 하와이 출신의 패기 넘치는 셰프 조던 키아오가 선보이는 우드파이어 다이닝이다. 장작과 숯으로 불맛을 내는 우드파이어 다이닝은 최근 몇 년 사이 글로벌 미식계에서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입구에는 도축된 고기와 농산물이 진열되어 있고 오픈 키친에서는 이를 그릴에 굽거나 허브로 훈제하는 등 불을 사용해 재료의 풍미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코스 요리를 선보인다. ‘하이랜드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 래플스 라이터스’는 이름처럼 래플스만을 위해 특별 생산된 위스키다. 라 담 드 픽에선 프랑스 와이너리 도멘 바쉐롱이 래플스에만 공급하는 와인을 맛볼 수 있다. 티핀룸에서는 인도 와인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인도는 최근 들어 와인 생산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쉐린 1스타 프렌치 레스토랑 라 담 드 픽에서 내는 요리

래플스에서 장중한 우아함, 고풍스러운 감성을 충분히 만끽했다면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자유로움 속으로 빠져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먹고사는 삶의 현장이자 다문화의 상징적인 공간 호커센터다. 대중적 푸드코트인 호커센터에서는 세계 각국의 전통음식, 퓨전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50~60년 된 노포도 많다. 3~5싱가포르달러(2900~4800원)면 먹을 수 있는 메뉴도 상당수라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에게도 반가운 곳이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호커찬(Hawker Chan)은 2016년 길거리 음식으로 최초로 미쉐린 원스타를 받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미쉐린 스타 식당이라는 별명을 얻은 곳이다. 치킨라이스를 주력 메뉴로 한다. 이외에도 호키엔 미(Hokkien mee 쌀국수 볶음), 블랙페퍼크랩, 피시헤드 커리(생선 머리가 통째로 들어간 커리 요리), 바쿠테(Bak kut teh 돼지갈비탕), 츠위쿠에(Chwee Kueh 절인 무를 곁들여 먹는 라이스케이크), 딤섬류, 락사(Laksa 쌀국수 수프), 비훈(Bee hoon 국수 요리), 비르야니(Biryani 볶음밥의 일종)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음식을 호커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싱가포르식 빙수 첸돌(Cendol),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나는 작물 판단(Pandan) 잎을 활용한 판단 쿠키와 케이크, 쌀과 코코넛가루로 만든 떡의 일종인 논야쿠에(Nonya Kueh) 등은 싱가포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의 디저트들이다. 뉴톤푸드센터, 맥스웰로드 호커센터, 티옹바루마켓 호커센터, 차이나타운 호커센터 등은 유서 깊은 노포가 밀집해 있는 곳들. 천천히 둘러보며 어떤 음식이 있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부분 한자 간판이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선 곳을 찾아 주문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좀 더 쾌적하고 세련된 곳을 찾는다면 에스플러네이드몰 옆에 있는 마칸수트라 글루톤스 베이 호커센터가 있다. 싱가포르에서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마칸수트라가 선별한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는 야외 호커센터로, 마리나베이를 볼 수 있어 전망도 좋다.

마칸수트라 글루톤스베이 호커 센터

싱가포르의 유서 깊은 상업지구이자 맛집 많기로 유명한 탄종파가르(Tanjong Pagar)에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글 간판을 단 고깃집과 프라이드치킨 전문점, 막걸리바 등이 많이 생겨났다.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부쩍 늘어났다. 탄종파가르 근처에 있는 미쉐린 원스타 레스토랑 ‘메타’는 현지인들에게 유명한 김선욱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한식은 아니지만 동서양의 디테일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달 21일 싱가포르 베이 프런트 이벤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푸드 페스티벌 현장을 찾았을 때도 재미있는 광경이 눈길을 끌었다. 행사장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타이거 맥주 부스 앞에는 지드래곤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과 함께 ‘타이거 소주 인퓨즈드 라거’라는 간판이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한마디로 타이거 맥주와 한국 소주를 혼합한 ‘폭탄주’다. 포도맛과 자두맛 2종류, 살짝 향을 가미해 ‘소폭’에 부드러움을 더했다. 300㎖ 한 잔에 10싱가포르달러(9800원)이니 결코 싸지 않다. 그런데도 주문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았다. 100여가지 레스토랑과 식품 브랜드, 카페, 디저트숍이 대표 메뉴들을 내놓고 방문객들을 맞는 음식 축제에서 과연 무엇을 먹어야 의미 있는 만찬이 될까. 고민 끝에 고른 메뉴는 르막 락사(코코넛 밀크와 매콤한 향신료를 넣은 쌀국수), 칠리페퍼크랩 주먹밥, 그리고 타이거 소주 인퓨즈드 라거 자두맛. 낯선 맛, 새로운 맛, 익숙한 맛의 향연이 이어졌다.

싱가포르 푸드페스티벌에서 방문객들이 타이거 소주를 맛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마칸수트라 푸드가이드를 창립한 KF 시토는 넷플릭스의 다큐 프로그램 <길 위의 셰프들: 아시아>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싱가포르는 아주 젊은 나라다. 우리만의 언어, 고유의 노래, 전통의상 등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단 음식만 빼고.”

오로지 먹기 위해 기꺼이 향할 수 있는 나라. 싱가포르의 다양성을 이끄는 선봉이자 원천은 음식이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맛보는 것은 세계를 맛보는 것이다.

싱가포르 푸드 페스티벌을 찾은 방문객들

싱가포르 |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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