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황제’를 떠받친 스핀 닥터[책과 삶]
크렘린의 마법사
줄리아노 다 엠플리 지음·성귀수 옮김 | 책세상 | 372쪽 | 1만6000원
2020년 2월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러시아 대통령 수석보좌관 경질을 전하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외신은 수르코프를 ‘푸틴 체제 실력자’ ‘푸틴의 오른팔’ ‘막후 조정자’ ‘회색 추기경’ ‘제2의 라스푸틴’으로 수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국부’의 반열에 올려놓고,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주권 민주주의’란 이데올로기로 떠받친 사람이다. 수르코프는 소설 <크렘린의 마법사>의 주인공 바딤 바라노프의 실존 모델이다.
소설도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 중인 작가 ‘나’가 푸틴 대통령의 고문직을 내려놓고 칩거 중인 바라노프를 만나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소설에서도 바라노프는 ‘크렘린의 마법사’이자 ‘스핀닥터’다. 허구와 사실을 결합했지만, 저자 줄리아노 다 엠플리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소설에 묘사한) 사생활 말고는 거의 다 사실”이라고 했다. 1999년 러시아 아파트 폭탄 테러와 제2차 체첸전쟁, 2004년 오렌지혁명, 2013년 유로마이단혁명,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소치 올림픽 같은 사건이 나온다. 수르코프 말고는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썼다.
소설은 이 굵직한 실제 사건을 배경에 놓고 푸틴과 러시아 정권에 대한 일종의 정치 분석과 비평을 시도한다. 푸틴의 심리도 파고든다. 엠플리는 소설 대부분을 바라노프의 모놀로그나 회고록 형식으로 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주목할 건 푸틴의 이념과 동기, 전체주의 체제 수립과 권력 작동 방식, 선전과 선동에 관한 대목들이다.
바라노프가 FSB(구KGB) 국장인 푸틴 눈에 든 건 이 말 덕이다. “(가장 위대한 여배우는) 그레타 가르보입니다. 왜일까요?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우상의 권력은 강화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신비감이 곧 힘의 원천인 것이죠.”
푸틴은 이후 바라노프를 불러내 이런 말을 한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분리주의자들을 패퇴시켜, 러시아 연방의 결속을 저해하는 저들의 위협을 영구히 분쇄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러시아 대통령은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릴 수 없거니와, 조아려서도 안 됩니다”라고도 했다.
푸틴은 1999년 총리 자리에 오른다. 러시아 폭탄 테러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체첸 공화국의 그로즈니 공항 폭격 지시가 상황을 더 악화할 위험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기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내뱉는다.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도 지겹네요.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어디 숨든 그들을 박살 낼 겁니다. 그들이 공항에 있으면 공항을 박살 낼 것이고, 만약 뒷일을 보고 있다면,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화장실까지 쫓아가 죽여버릴 겁니다.” 바라노프는 푸틴이 러시아인의 주목을 받은 순간으로 꼽는다.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 누군가가 다시 나타난 거예요. 그날부로 푸틴은 명실상부한 차르(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바라노프는 푸틴의 이 발언을 두고 정치의 단 하나의 목표 추구가 “인간의 공포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푸틴은 “인생을 말랑말랑하게 해줄 다른 즐거움들”에 무감했다. “하긴 파우스트의 말처럼, ‘남에게 지시하는 자는 지시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법’이니까요.” 권력과 지배욕, 러시아 민족주의를 두고는 극도로 예민했다. 이 차르는 “수 세기 전부터 러시아 영토의 일부인 곳을 잃는다는 생각만 해도 광분을 금치” 못하는 인물이었다. 권좌와도 이어지는 문제였다.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대한 러시아 집권 세력의 인식도 나온다. “조지 소로스와 미 의회,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을 받아 고삐 풀린 군중이 트빌리시와 키이우, 비슈케크를 점거하고 합법적인 선거 결과를 폭력으로 무효화”한 폭동으로 여겼다. “오렌지 폭동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여파가 러시아로 확산해 그(푸틴)의 권좌를 뒤엎고 서구세계의 꼭두각시를 대신 앉힐 거였습니다.”
https://www.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2308081520011
푸틴은 이후에도 ‘반역’ 대한 분노와 응징 의지를 드러낸다. 스탈린의 학살을 두고도 이렇게 말한다. “자네들(지식인들)은 스탈린이 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그는 바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거라고. 그는 적어도 도둑과 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지.” 소비에트 열차에 잇달아 사고가 나자 스탈린이 철도국장을 태업 혐의로 총살한 일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푸틴은 프로파간다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권 이후 ‘혁명 전위대’를 양성한다. “대중 앞에서 말발이 서고, 선전 선동을 수행할 줄 아는 사람. 현 투쟁 단계에서는 이념을 전파하여 국가 볼셰비키 혁명을 증폭시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전략무기가 되는 거라고.” 푸틴은 “러시아의 독자성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칠 새로운 애국 엘리트층”을 만들어내려 했다.
바라노프는 러시아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국가의 역량과 모든 자산을 총동원하는 주권 민주주의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 주권 민주주의는 권력과 혁명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권력 독점만으로는 부족했다. “권력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까지 독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혁명’과도 연결된다. “체제가 혁명을 품어 안으면, 혁명할 이유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모터사이클 폭주족과 훌리건, 아나키스트와 스킨헤드족, 공산주의자와 사이비 광신도들, 극우와 극좌, 중도를 표방하는 거의 모든 이들이 “세상을 향한 울분을 마음껏 토로하고 차르에게 온전한 충성을 바치는 저들을 보듬을 수 있도록, 러시아가 드넓은 광장이 되어주는” 게 방법이었다. 실제 수르코프도 스킨헤드와 인권단체를 번갈아 후원하며 대중을 혼돈에 빠뜨리는 방식을 썼다.
“박사학위의 거만함이 묻어나는 경제학자들, 1990년대를 살아남은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 인권 전문가들과 과격한 여성 페미니스트들, 환경운동가들, 완고한 채식주의자들, 게이 활동가들” 그룹에 속한 이들이 푸틴을 비난하는 일을 푸틴 지지율을 올리는 데 이용한 것도 이 스핀닥터의 방식이었다.
바라노프는 “힘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진짜 힘이 생기는 법이다”(레츠 추기경)라는 말을 인용하며 음모론 활용 방식도 이야기한다. 음모론이 나오면 “뭔가 수상쩍게 행동하면서, 터무니없는 반박을 내놓”는 방식이다. “러시아인이 새로운 세계를 주무르고 있었다니! 그때부턴 밤의 망상에 의해 저절로 혼돈이 불어납니다. 우리의 힘은 전설에서 현실로 옮겨가지요.” 바라노프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행동은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푸틴은 이런 말을 바라노프에게 한다. “음모론자들은 자기들이 되게 영악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엄청 순진하거든. 세상 모든 것에 숨은 의미가 있기를 바라지. 대수롭지 않은 언행, 방심, 우연이 가진 힘을 철저하게 평가절하해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야. 현실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인걸. 우린 음모론자들 덕분에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권력이라는 것을 말이야, 인간적인 약점들을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왠지 다 알 것 같은, 그래서 뭔가 판을 짜고 있을 것 같은 어떤 실체의 아우라를 덧씌워 바라본다니까. 그 정도면 엄청난 찬사를 퍼붓는 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바라노프는 “전위연극의 기교를 정치의 영역에 도입한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BBC가 실제로 수르코프가 연극과 정치를 결합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소설 속 모스크바의 연극예술 아카데미 출신인 바라코프는 정치도 연극 무대로 봤다. “정치적 이해관계란 덩치 큰 야수뿐 아니라 시체 청소부인 하이에나까지 동시에 유혹하는 만화경에 불과해요. 내게 중요한 특권이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이 매일같이 펼쳐지는 세계 무대의 현장을 추적한다는 독특한 체험에 있었어요.” 엠폴리는 책 맨 앞장에 “인생은 연극이다. 진지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말을 인용했다.
러 이탈리아 정치인의 고문을 맡았던 엠폴리의 소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 푸틴의 침공 이유를 분석하는 데 도움 되는 책이라는 이유가 많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도 서평이 실렸다.
소설은 러시아 최고 실력자의 고백과 회고 형식, 즉 일종의 ‘내재적 접근’ 때문에 비판받기도 했다. 푸틴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묘사나 푸틴을 러시아 민중의 의지 체현자로, 그의 등장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한 대사 등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21일 “소설이 푸틴에 대해 동정적이고 관대하다” 등 여러 비평가의 분석을 담은 기사를 “몇몇 비평가들이 말했다. ‘이 히트작은 푸틴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도 너무 잘’ ”이란 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독재자의 권력욕과 잔인함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대목도 여러 군데 나온다. “권력이 강제로 불협화음을 압살할 경우, 사회 전체가 굴라크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화음이 억압당한다면 머잖아 세상은 박자 맞춘 행진을 위한 공간밖에 남지 않겠지요.” 바라노프는 이렇게도 말했다. “차르의 이상은 모든 적과 심지어 친구들, 부모와 자식, 아마도 코니(푸틴의 애견)까지 희생해가며 홀로 우뚝 살아남은 자의 고독한 무덤일 겁니다. 모든 생명체의 멸절을 조건으로요…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유일한 권좌는 죽음이지요.”
“우두머리는 자기 본능에 충실합니다. 뼛속까지 적자생존에 길든 포식자의 직감을 갖추고 있어요.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모두를 죽이는 길뿐입니다.”
권력의 허망함ㅇ을 담은 대목도 여럿이다.
“힘 있는 사람 대부분은 현재 머무는 직위로부터 자신의 아우라를 끌어낸다. 그러다가 직위를 잃으면, 그건 마치 붙잡고 있어야 할 무언가를 놓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그들은 놀이공원 입구에 서 있는 인형들처럼 바람이 빠져나간다.”
“버림받은 권력의 현장보다 더 서글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곳엔 살과 피를 가진 채 여전히 집착하는 사람보다 과거의 망령이 더 강력한 잔영으로 남거든요.”
소설은 202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받았다.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프랑스에서 40만부 넘게 팔렸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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