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한반도 종단…남달랐던 '카눈' 느리고 강했다
머리채 잡아끄는 지향류 없어서 속도 느리고 체류시간 길어
(서울=뉴스1) 황덕현 기후환경전문기자 = "지금껏 한반도에 영향을 준 모든 태풍 데이터를 며칠간, 여러 번 확인했다. '이런 경로'는 없었다."
박정민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태풍의 한반도행이 확정됐던 지난 7일 이같이 밝혔다. 중국 상하이행과 일본 규슈 지방 상륙 전망이 왔다 갔다 한 끝에 카눈이 택한 길은 한반도, 그것도 '정중앙 관통'이었다.
제6호 태풍 카눈은 관측 사상 전례 없는 경로로 상륙해 남한 16시간, 북한 5시간 등 한반도를 21시간가량 휩쓸었다. 유별난 점은 또 있다. 속도는 거북이걸음하듯 느렸고, 상륙 직전까지 성장했다. 국토에 머문 시간도 길었다.
카눈은 지난달 28일 발달한 뒤 약 14일간 태풍 지위를 누렸다. 통상 5~7일인 태풍 수명과 비교하면 2배가량 길게 활동한 셈이다.
이는 카눈의 '갈지자' 경로 때문이다. 카눈은 지난달 28일부터 3일까지 약 6일간 상하이 방면으로 직진했다. 이후 4일까지 사람이 걷는 속도로 정지했다가 5일쯤 본격적인 북상을 시작했다.
일본 규슈 지방을 관통해 동해로 진출할 것으로 예측됐던 진로는 하루 만에 바뀌었다. 이후 카눈은 경로를 바꾸지 않고 한반도 중앙을 관통했다.
카눈의 직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대 고기압 때문이다.
상하이 방면으로 이동하던 카눈은 지난 3~4일 대륙성 기단인 티베트 고기압에 막혀 동중국해에 정지했다. 이후 동진은 편서풍 등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일본행 가운데 북태평양 고기압에 막히며 직진으로 북상했다. 한반도행은 기압배치상 불가피했다.
카눈은 지리산 자락을 통과한 뒤 속도가 시속 30㎞대로 잠깐 빨라졌으나 이후 대부분 시속 20㎞대에 머물렀다. 이동속도가 시속 30~50㎞까지 빨라지는 통상 태풍과 다르게 천천히 내륙을 할퀴었다. 이는 통상 북쪽에서 태풍을 이끄는 제트기류의 지향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극 지방에서 태풍 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기는 힘이 없어서 카눈은 품은 에너지를 천천히 쏟으며 코뿔소처럼 우직하게 북상했다. 느린 이동 속도 탓에 카눈은 상륙 지점인 경상권과, 지형효과가 더해진 강원 영동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여기에 남해안까지 평년보다 높아진 수온이 카눈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한 점도 태풍이 상륙 직전까지 성장한 데 지대한 영향을 줬다. 기상청에 따르면 한반도 주변의 해수면 온도는 평년보다 1~2도 높은 29도에 달했다.
한반도 가운데를 뚫은 데다 속도가 느리다 보니 내륙에 머문 시간이 16시간이나 돼 평소보다 2배가량 길었다. 시속 30~50㎞로 국토 일부를 지나칠 경우 태풍은 6~12시간가량 머물다 빠져나간다. 지난해 포항 일대를 할퀸 힌남노나 2003년 매미는 6시간가량 내륙에 머물렀다.
카눈이 상륙하면서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비가 내렸다. 속초엔 402.8㎜ 비가 내렸고, 삼척에는 387.0㎜, 양산 350.0㎜, 강릉 346.9㎜, 북창원 338.6㎜의 비가 왔다.
특히 가장 많은 비가 내렸던 속초에는 전날(10일) 오후 2시5분부터 1시간 만에 91.3㎜의 극한호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긴급재난문자 발송 수준의 폭우로, 역대 태풍에 의한 1시간 강수량 중 7위에 해당한다. 다만 긴급재난문자는 수도권에서 시범운영 중이라 속초 지역에 문자가 발송되진 않았다.
물론 비가 아예 내리지 않은 곳도 있다. 인천 백령도와 신안, 진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10일 하루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가장 셌던 곳은 부산(가덕도)으로 최대순간풍속 시속 126㎞의 바람이 불었고, 계룡산 시속 117㎞ 고성 향로봉 시속 112㎞의 강풍이 내륙을 훑었다.
전례 없는 태풍 진로는 앞으로 어디든 태풍이 상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태풍 진로 예측이 비교적 정확했으나 '태풍의 길'을 내는 북태평양 고기압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따른 영향 등도 추적·분석이 필요하다.
기상청과 국립기상과학원은 이후 북태평양 고기압 분석을 강화하기 위해 기상관측선과 해양기상 관측 장비를 확대하는 등 북태평양 고기압의 확장·수축을 관측·분석 중이다.
ac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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