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나누면서[살며 생각하며]
차 한잔엔 우주의 기운 담겨
수천년 햇빛·바람·물도 함께
마음에 걸린 빗장 풀어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이어줘
18년 남도 차 여행 하다보니
즐거움에 여유로움까지 생겨
해마다 4월 말이면 남도로 향한다, 차(茶)를 만들기 위해. 야생차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꿈같은 하동 길은 설렘 그 자체다. 인화된 사진처럼 각인된 섬진강을 끼고 도는 물안개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은 지난 18년 동안 길을 나서게 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 봄날, 지인들과 함께 여린 찻잎을 가마솥에 덖어 1년간 마실 차를 하루 동안 제다(製茶)한다. 하루 전날 채취한 찻잎을 섭씨 300도 안팎의 뜨거운 가마솥에서 덖고 비비는 작업을 서너 시간 하고, 건조 시간을 거쳐 마지막 가향(加香) 처리를 마치면 전 과정이 그날 중에 마무리된다. 녹색의 찻잎이 열에 의해 건조되고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차가 되는 과정은 과학인 동시에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온 마음을 담아 제다 과정을 거치면 차 맛 또한 각자의 마음을 닮아 제각기 맛이 다르다. 순간순간 몰입도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 맛을 결정한다. 옛 선사들의 차 수행이 이해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신이 마실 녹차를 직접 제다해 보면 남다른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을 때가 많다.
이미 우리네 선조는 고려·조선 시대 내내 차를 가까이했다. 조선 시대 사헌부에서는 조회·종례 때 ‘다시(茶時)’라 하여 반드시 차 한 사발을 함께 나누는 것을 내부 규정으로 정해 실시하였다는 실록 기록도 보인다. 차 한 사발이 관리들의 정쟁을 완화하는 데 일조하고, 고된 업무 스트레스를 줄여 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양반들만 차를 즐겼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람이 원하면 차를 마실 수 있다.
2007년 무렵 일어난 농약 녹차 파동은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동·보성·제주의 녹차 농가의 판매량이 뚝 떨어지고 그 여파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데 당시 농약 오염 녹차는 일부 티백에서 나타난 것이고, 그 원료 대부분이 저급 중국산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렇지만 한 번 잘못 각인된 선입견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직접 차 재배 농가에 가서 그 현황을 보거나, 직접 제다해 보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지만, 그런 기회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혹자는 차가 냉한 성질이 있어 꺼리는 예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잘 만든 녹차는 제조 과정에서 냉한 성분이 다 증발한다. 체질적으로 녹차가 맞지 않는 이는 발효차를 마시면 된다. 녹차의 이점은 이미 미국의 ‘타임’이 수년 전에 10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선정한 것에서도 그 우수성을 알 수 있다. 지난 코로나19 대유행 때도 유럽의 각 언론 매체에서 녹차가 코로나에 대한 면역성을 유지·증강하는 데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고 여러 차례 보도했다.
차를 즐기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 가끔 판사실에서 조정기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재판 당사자들과 직접 우린 차 한잔을 나누다 보면, 잠깐의 여유가 각자의 마음에 걸어둔 심리적 빗장을 열기도 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절한 조정안을 제시하면 대법원까지 갈 뻔한 송사를 단번에 해결한 사례가 지난 35년간 여러 번 있었다. 결과적으로 따뜻한 차 한 잔이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한 셈이 된다.
녹차를 매개로 가장 기억에 남는 조정 사례는 국제적 기업 사이의 대규모 특허분쟁이다. 2005년 무렵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부 재판장 시절이다. 일본 농약 회사의 제초제 국제 특허권을 한국 기업이 침해했다고 일본 기업 쪽에서 거액의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건이 오랫동안 진행되던 때 일이다. 기일마다 일본 회사 중역 서너 명이 방청했고, 조정을 통해 합의를 이룰 목적으로 재판장실에서 대리인, 양쪽 회사 관계자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직접 만든 하동 녹차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15세기 이후 한·일 간의 녹차 역사와 이도다완(井戶茶碗) 찻잔으로 이어져 갔다.
중역 중 한 분이 “차를 아는 판사는 국수적 편파 재판을 할 리가 없으니 재판장이 생각하는 중재안을 제시해 달라”고 했고, 그때를 기다리던 참에 준비한 합리적인 조정안을 주었다. 수년간 공방하던 거액의 국제특허 분쟁이 차를 통해 상호 교감의 문이 열려 원만하게 합의되었다. 그 외에도 부모·자식, 형제자매 간의 많은 다툼에서 차 한 잔으로 서로 앙금을 풀고 원만한 조정에 이른 사례는 종종 있었다.
필자는 지금도 후배 법관이나 직원들이 오면 차를 나누며 대화하는 것이 생활 습관으로 남아 있다. 재판부 합의나 회의할 때도 어김없이 차를 나누곤 한다.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다 보면 서로의 의사전달이 부드럽게 되면서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리곤 한다.
차만 마시던 예전과는 달리 최근 들어 하루 한두 잔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따스한 차 한잔을 마신다. 물을 끓이고 차의 색과 향이 오감을 통해 몸에 스며들면 수십 조의 세포가 깨어나고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차 한 잔에 온 우주의 기운이 오롯이 담겨 있다. 수천 년 이어진 햇빛과 바람, 차를 기르는 농부의 땀과 향기로운 차로 만드는 제다 장인의 공덕이 곧 이 한 잔의 차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단 한 분이라도 차향과 다도의 세계에 입문하여 심신의 건강도 챙기고, 주변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도구로 삼아 보기를 먼저 경험한 인연으로 간절히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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