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에 지배되지 않는 인간… 환경따라 외형까지 달라진다[북리뷰]

2023. 8. 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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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 유전자
에드윈 게일 지음│노승영 옮김문학동네
남한-북한사람 체형의 차이는
생활따라 유전자표현형 다른탓
구석기-농경-현대사회 짚어내며
납작해진 얼굴·사교생활 발달 등
인류의 신체·지능적 변화상 다뤄
영양과잉 등 풍요의 역설도 언급
게티이미지뱅크

19세기 조선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1㎝, 여성 평균 신장은 142㎝였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비슷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전쟁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키는 남북한 모두 비슷했다. 그러나 50년 후, 남북한 사람들의 체격 차이가 나타났다. 2002년 유엔 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취학 전 아동은 북한 아이보다 키가 13㎝ 크고 몸무게도 7㎏ 무거웠다. 또 북한 성인 여성의 키는 달라지지 않았으나, 남한 여성의 키는 무려 20.2㎝가 커져 세계 기록을 달성하면서 162.3㎝가 되었다.

유전자는 인구 집단 내 차이를 결정하는 반면, 환경은 차이를 결정한다. 남북한 사람들의 유전자는 똑같다. 그러나 자란 환경이 두 지역 사람을 다르게 만들었다. 생물학에선 이러한 유전자 발현 형태를 표현형이라고 한다. 환경의 체에 걸러지고 삶의 역정에 따라 변화하는 표현형은 생명체가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가를 보여준다.

‘창조적 유전자’에서 에드윈 게일 영국 브리스톨대 명예교수는 생물학, 사회인류학, 역학, 역사학 등의 학문을 융합해 인류 역사를 식량 생산을 중심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식량은 인간 성장과 발달에 영향을 미쳐서 표현형을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첫 단계는 인류사의 95%를 차지하는 구석기 표현형이다. 구석기인은 마라톤 선수만큼 깡마르고 탄탄했다. 이들은 소규모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면서 살다가 우연히 불로 음식물을 익혀 먹는 법을 알아냈다. 그 덕분에 요리는 얼굴 표현형을 납작하게 변화시켜, 인류가 표정만으로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고, 언어와 노래를 탄생시켜 사회적 상호작용과 경쟁, 즉 사교 생활을 시작하게 했다. 이는 활과 화살 같은 기술 혁신, 조각과 벽화 같은 예술 표현, 약자에 대한 돌봄, 망자에 대한 존경 등 현대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단계는 농경 표현형이다. 경작과 곡물 섭취와 함께 현재 우리 몸과 사회의 기본형이 탄생했다. 이 시기에 인류의 표현형은 둘로 갈라졌다. 영세농들은 고역, 질병, 주기적 기근에 시달리면서 체구도 작고 비쩍 마른 채 살아갔고, 특권층들은 잘 먹고 살아서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졌다. 신화나 민담 속 영웅들이 대개 미남 미녀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200년 전 화석 에너지를 손에 넣은 후, 인류는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자연선택에서 탈출할 힘을 얻은 인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를 멈추고, 자기 필요와 욕구에 맞춰 세상을 바꾸어갔다. 인간 뇌의 풍부한 가소성(표현형)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뇌는 배운 걸 반복하기보다 변형을 거듭하면서 자동화될 때까지 끝없이 고쳐 쓴다. 대를 이어 발전시킨 지식과 기술은 인류에게 창조의 역량을 불어넣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조상들이 상상 못 할 정도로 풍요로운 세계를 이룩했다.

물질적 풍요는 인류의 표현형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책 부제가 ‘풍요가 만들어 낸 새로운 인간’인 이유다. 성장의 가속화, 조기 성 성숙, 몸집 증가, 수명 증가 등이 근대인의 특징이다. 1950년 이후엔 풍부한 식량, 넉넉한 에너지, 전염병 극복, 앉아서 움직임 없이 살아가는 좌식 생활을 누리면서 인류에게 풍요의 저주, 즉 소비자 표현형이 나타났다. 근육이 줄고 지방이 많아진 탓에 체력은 떨어지고, 과잉 영양 섭취가 일반화하면서 비만이 심해져서 많은 사람이 고혈압, 당뇨병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표현형이 변하면서 삶의 경험이 달라지고 생각도 변했다. 인류의 평균 지능지수는 10년마다 3~5점씩 올랐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문해력의 확산 덕분이다. 문해력은 인류를 더 똑똑하게 만들진 않았으나, 인류가 자신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 인구 90%가 문해력을 갖추면서 자기를 인식하고 타자를 이해하는 데 정신의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인류는 사회 유지에 폭력보다 대화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우리는 스스로를 어느 만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지나친 풍요를 추구하다 만성 영양 과잉과 극단적 노령이라는 난제와 맞닥뜨렸을지라도,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여전히 유전자와 환경은 하나로 어우러져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만든 세상에 적응하고, 그 너머에서 더 나은 표현형을 이룩할 때까지 분투를 멈추지 않는 일은 당연한 의무일 테다. 484쪽, 2만5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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