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앞세운 석유화학의 ‘변신’…미중 갈등 속 체질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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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은 ‘산업의 쌀’이라고 부른다. 화석연료에서 추출해 플라스틱, 섬유, 고무뿐 아니라 페인트, 화장품, 의약품, 농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석유화학으로 만들어진다. 한국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지만 석유화학 제품 수출은 반도체, 자동차, 기계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화학제품은 우리 삶 어느 곳에서나 쓰이기에 경기에 많이 영향받는다. 경기가 좋을 때는 석유화학 산업도 좋고, 경기가 나쁘면 석유화학 산업은 직격탄을 맞는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석유화학 산업은 현재 다소 안 좋더라도 다음 경기 사이클에 대비하며 희망을 갖는다.
중국 석유화학, 수직계열화
현재 석유화학 산업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효과가 예상보다 크지 않아서다. 한국에서 생산한 석유화학 제품의 절반은 수출하는데 그중 절반은 중국을 향한다. 중국 경기가 개선되지 않으니 한국 석유화학 산업도 풀리지 않는다. 문제는 중국 경기가 개선되더라도 한국 석유화학 산업은 개선이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의 석유화학 산업이 기초유분부터 최종제품까지 수직계열화가 되면서 점차 한국 석유화학 업체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다행히 한국 석유화학 업체도 이런 상황에 대비해왔다. 엘지(LG)화학 사례로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자.
LG화학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고 있다. 신호탄은 노국래 석유화학사업본부장이 2023년 6월 중순 임직원에게 보낸 전자우편이었다. 노국래 본부장은 “글로벌 제조업 경기 침체로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수요가 부진한 상황에서 구조적 공급 과잉 이슈가 겹쳐 시황 회복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범용 사업 중 경쟁력 없는 한계사업에 대해 가동 중지, 사업 철수, 지분 매각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인력 재배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LG화학은 여주 NCC(나프타분해설비) 2공장 매각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반발을 우려해 ‘확정된 바 없다’고 하지만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 업황이 좋지 않고 NCC 공장을 제값 받고 팔기 쉽지 않아 부인하고 있지만 결국 매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NCC 2공장은 정기 보수를 위해 가동을 중단했는데, 보수가 끝난 뒤로도 가동을 재개하지 않고 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석유화학 공장을 방문해 노동조합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신 부회장은 “현재의 경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사업 합리화는 불가피하다”며 “한계사업에 대해서는 구조개혁이 진행될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한다”고 밝혔다.
2022년 4분기 LG화학 석유화학 부문 매출액은 4조2790억원으로, 영업이익은 1660억원 적자였다. 2023년 1분기 매출액은 4조5790억원으로 소폭 증가했지만 여전히 510억원 적자다. LG화학은 1분기 석유화학 부문 실적에 대해 “공급 과잉이 지속되지만 성수기가 되고 중국 수요가 개선되면서 점진적인 시황 회복을 전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리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석유화학 제품 공급망은 한국과 중국이 긴밀하게 연결됐다. 한국에서 만든 석유화학 제품은 중국에 중간재로 수출되고, 중국은 이를 가공해 미국으로 수출한다. 문제는 중국 석유화학 국산화가 점차 빈틈없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중국 공업화부는 2022년 ‘제14차 4개년 계획 기간 석유화학 업종의 질적 발전에 관한 지도의견’을 발표했다. 석유화학을 산업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기간산업으로 규정해 질적 발전을 위한 다섯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기초유분의 대량 확보, 공업단지 확대, 산업 집중도 개선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화학산업의 규모를 키우고 체계적인 투자로 수직계열화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이전에도 중국은 꾸준히 석유화학 설비를 증설했다. 그때마다 한국 석유화학 위기론이 거론됐지만 수혜를 보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합성섬유·페트병 생산에 사용되는 테레프탈산(TPA)은 파라자일렌(PX)을 원료로 한다. 중국이 합성섬유·페트병 생산을 늘릴 때 한국의 테레프탈산 수출이 늘었다. 중국이 테레프탈산 설비를 대규모로 확충하자 한국의 파라자일렌 수출이 늘었다. 그런데 중국이 테레프탈산과 파라자일렌의 국산화율을 높이고, 에틸렌·자일렌 등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유분까지 수직계열화를 갖춰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2025년 이후 기초유분과 중간원료의 자급률이 100%를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김서연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중국의 자급률 상향 정책을 감안하면 중국 내 수요가 예상보다 크게 성장하더라도 수입보다는 자국의 설비 가동률을 우선 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LG화학이 매각을 추진하는 NCC 공장은 석유에서 뽑아낸 납사로 에틸렌, 파라자일렌 등을 생산하는 설비다.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팔 곳이 마땅치 않으니 설비를 매각하려는 것이다.
LG화학, 전지 재료 매출 급증
그렇다고 미지근한 물속 개구리처럼 한국 석유화학 업체들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 한국 기업들은 시대적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LG화학의 경우 석유화학 회사에서 2차전지 소재 회사로 변모하고 있다. LG화학의 석유화학 부문 매출액은 2021년 20조8천억원에서 2022년 21조 7천억원으로 소폭(4%) 늘었다. 반면 2차전지 소재가 포함된 첨단소재 부문 매출액은 4조8천억원에서 8조원으로 67% 급증했다. 첨단소재 매출 중 전지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31%에서 2022년 60%로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아직은 전체 매출에서 석유화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하지만 점차 2차 전지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될 전망이다. LG화학의 2023년 매출 목표는 석유화학 부문 7% 감소, 첨단소재 31% 증가다. 석유화학의 매출 감소를 2차전지 소재가 빠르게 메우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된다. LG화학은 최근 충북 청주 양극재 공장에서 차세대 전지용 하이니켈 단입자 양산을 시작했다. 단입자 양극재는 기존에 사용되는 다입자 양극재보다 전지 수명이 30% 이상 개선되며, 에너지밀도도 10%가량 높다. 탄소나노튜브 공장도 충남 서산시 대산에 짓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는 열전도율이 구리와 동일하고 강도는 철강보다 100배 강한 차세대 소재다. 주로 반도체 공정과 자동차 외장재 등에 사용되는데, 배터리 도전재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새로운 첨단소재 개발을 위한 투자액은 1분기 기준 5762억원으로 전년보다 16배 이상 증가했다.
LG화학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만 이 변화는 한국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서 나타난다. 한화솔루션은 화학 부문의 성장세가 둔화하지만 태양광 부문은 태양광 패널에서 시작해 종합 친환경 에너지 사업자로 전환하는 과정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또 3조2천억원을 투자해 미국에 대규모 태양광 셀, 모듈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 태양광 생산 설비가 완성되면 생산 규모는 2021년 1.7GW(기가와트)에서 2024년 8.4GW로 대폭 확대된다. 이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잉곳부터 모듈까지 수직계열화한 통합 공급망이 구축된다.
한화는 종합 친환경 에너지 주력
롯데케미칼은 2조7천억원을 투입해 2022년 10월 세계 4위 동박 회사인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인수했다. 동박은 2차전지 음극에 들어간다. 또 2차전지 전해액 유기용매 설비를 갖추기 위해 3500억원을, 배터리 재활용 설비에 770억원을 투자한다.
포스코퓨처엠은 내화재 업체에서 벗어나 배터리용 양극재와 음극재를 만드는 2차전지 소재 회사로 거듭났고, 플라스틱을 만드는 에스케이(SK)지오센트릭은 2025년부터 친환경 재활용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자국 중심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지는 글로벌 통상 환경의 변화는 수출국가인 한국에 이롭지 않다. 특히 미국의 무역 규제를 받는 중국이 산업 내재화율을 높일수록 중국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은 타격 입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에 과감하게 먼저 투자하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위기를 걱정하는 이 순간에도 한국 석유화학 업체들의 변신은 계속된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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