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은 미리 계산했어요"…봄 같은 '춘천 책방'[인류애 충전소]
[편집자주] 세상도 사람도 싫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위로받기도 하지요. 숨어 있던 온기를 길어내려 합니다. 좋은 일도, 선한 이들도 꽤 많다고 말이지요. '인류애 충전소'에 잘 오셨습니다.


'미미책 선물. 뜻있는 어른들이 청소년 여러분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청소년이라면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골라 당당하게 카운터로 가져오세요.'
17살, 아이도 책을 선물 받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름 모를 어른들이 남긴 메모를 살펴봤다. 신중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중 한 책을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집어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시집이었다.
아이는 책을 고른 이유를 이리 적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책 제목이 입시 생활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 것 같다."

오늘의 일은 오늘로 충분하다며, 따뜻하게 껴안아 주는 시(詩) 한 편. 3년의 공부로 지칠 때, 행여나 자책할 시간에, 아이는 그 책 제목만 보고도 위로받을 수 있을 터였다.
책방에 온 어른이 책을 미리 계산한다. 그 책을 이름 모를 아이에게 선물하겠다며 손 글씨 메모를 써서 두고 간다. 미래에, 한 아이가 찾아와 그중 맘에 드는 책을 가져간다. 봄 같이 따뜻한 춘천 '바라타리아 책방'에서 지난해부터 하고 있는, '미미책 선물' 프로그램이다.

어른들이 미리 계산해둔 책이 196권. 그중 아이들이 찾아간 책이 113권이다. 돈 없는 이들을 위해 커피값을 미리 계산해두는, 이탈리아의 서스펜디드 커피 생각도 났다. 하지만 책이고, 청소년이면 누구나 찾아간단 점에서 결이 또 달랐다. 궁금했다. 4일 오전 춘천 바라타리아 책방을 찾아 자세한 얘길 들어봤다. 책방처럼 포근한 장남운·강은영 사장 부부가 반겨주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다 갑자기 멈춰 뒤를 돌아본대요.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래요. 혹시 어딘가에서 내 영혼이 혼자 울고 있진 않은지, 바쁜 학업에서도 내 영혼의 일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어요. 어쩌면 이 책이 그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형도 : 책으로 응원하는듯 해요. 위로가 될 수도 있고요. 낯선 어른이 아이들에게요. 궁금합니다. 어떻게 시작하신 건지요.
은영 :중1 때였어요. 중간고사가 끝났을 때였고요. 스트레스를 풀고 싶더라고요. 차곡차곡 모은 용돈으로 동네 서점에 갔어요. 지금 느낌이지만 1시간 넘게 책을 골랐지요. 제 돈으로 제가 가서 고른 건 처음이었지요.
형도 : 생각해보니, 청소년 때 학습지 말고는 책을 그리 직접 골라본 기억이 없네요. 어떤 책을 사셨나요.
은영 : '제인에어'였어요. 엄마가 밥 먹으라는 것도 잊고, 엎드려서 질질 짜면서 읽었지요. 그러니 작품성을 떠나서, 그 책을 잊을 수 없는 거예요.

직접 골랐던 재미와 그로 인해 새겨진 추억. 그런 '경험'을 아이들에게도 겪게 해주고 싶단 마음이었던 거였다.
형도 : 아이들이 돈을 내고 책을 사기가 쉽진 않지요. 아마 그런 고민도 하셨겠어요.
은영 : 그렇죠. 학습지나 사라고 부모님께 야단 맞을 수도 있고요.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를 임경선 작가님 책에서 봤어요. 소년 하루키가 책을 아주 좋아했대요. 돈이 없어도 동네 서점에서 원하는 만큼 책을 가져왔다고요. 알고 보니, 그의 부모님이 서점 주인에게 아들이 가져간 책 값을 따로 지불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됐고요.

형도 : 좋은 작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군요.
은영 : 모든 결과엔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하루키 이야기에서 착안해 미미책 선물을 기획했어요.

형도 : 처음엔 어떤 책들이 놓였었을까요.
은영 : 엄청 고민했었어요. 왜냐면 제가 재밌게 본 거랑,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게 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만화책도 놓고, 재밌는 책들 놨었어요. 아이들이 스트레스 안 받고 골라가게 해주고 싶더라고요.

책방에 놓인 진심을, 아이들은 어떻게 봤을지. 책방 인근에서 공부방을 하던 수녀님이 와서 이리 걱정하기도 했단다. "애들이 책을 잘 안 봐서…과연 가져갈까요?"

형도 : 첫 책을 찾아간 친구는 누구였을까요. 기억나시는지요.
은영 : 당연히 기억나지요.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해 늦여름이었어요. 공부할 곳을 찾아온 고3 학생이었어요. 미미책 서가를 보더니 "이거 진짜 가져가도 돼요?" 하는 거예요. 너무 반가웠지요.
형도 : 기다리신, 첫 미미책 선물이었으니까요. 어떤 책을 고르던가요.
은영 : 미대를 준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저항의 미술'이란 책을 가져갔어요. 나중엔 아이 어머니도 오셨었고요. 단골이 됐지요.

형도 : 좋네요. 또 기억나는 친구가 있을까요.
은영 : 수능 끝나고였어요. 이모가 조카를 데리고 온 거예요. 점수가 생각만큼 안 나와 좌절이 컸나봐요. 아이에게 그게 너무 느껴지더라고요. 마음이 안타까웠지요. 아이가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를 가져갔어요. "지금 제 상황에 필요한 책이라 골랐습니다"라고 하면서요.

형도 : 선물하는 마음도 짐작이 되네요. 이 역시 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지요.
은영 : 지인이 말기암이어서 춘천에 병문안 오셨던 분이 있었어요. 마음이 울적해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 들리신 거지요. 위로를 받으려 자기 책을 세 권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미미책 코너를 본 거예요. 3만원을 주시면서 저희에게 책을 채워달라 하셨지요.

형도 : 맘이 복잡한 와중에도,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또 마음을 내어주신 거네요.
은영 : 서울에서 춘천까지, 책 선물을 위해 세 번씩 왔다가신 분도 있어요. 직장 다니시는 분이었는데요. 잘 고르셔서인지, 아이가 금방 가져갔어요. 말씀드렸더니 주말에 또 오시고, 그 책이 또 나갔고요. 그랬더니 휴가 내고 또 와서 책을 선물하고 가셨어요.
형도 :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참 그 마음이 좋네요.
은영 : 조건을 붙여서 선물하신 분도 있었어요. 장애인들 바리스타 교육하러 춘천에 오신 분이었지요. 정은혜 작가님 책을 고르시더니, "이 책은 장애인 청소년에게 갔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실제 지체 장애가 있는, 책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가 가져갔어요.
미래로 보낸 책이 그리 주인을 찾아간다. 청소년들이다. 원래는 책을 가져가는 대상이 '중고생'이라고 썼다가, 어느 손님의 당부로 '청소년'이라 고쳤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상처 받을까 걱정된단 섬세한 말. 그리고 며칠 뒤 홈스쿨링 하는 아이가 책을 가져갔다고.

그리 이야기가 쌓이고 있다. 100번째 미미책 선물도 기억난단다. 아이는 이리 말했다. "학교 화장실에서 박노해 시인의 글귀를 보고 위로 받았었어요." 그리고는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가져갔다.
우연히 책방에 들러, 아이들이 책을 고르고 좋은 추억이 생기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고 했다. 은영씨가 끝으로 이리 바람을 전했다.
"그 아이들이 아이를 낳아 '아빠, 엄마가 책 가져갔던 책방이란다' 그렇게 되길 바라봅니다. 그땐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 있겠지요. 그럴 수 있게 저희도 잘 버티고 싶고요. 혹시 모르지요. 아이들 중 하나가 하루키를 능가하는 세계적 작가가 될 지도요(웃음). 그게 아녀도 잠깐이나마 재밌는 추억으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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